공연평

* 국립무용단 『시간의 나이』(안무 조세 몽탈보) 4월27~29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제1장 ‘기억’. 무대가 시작된 것은 9명의 『삼고무』, 이어지는 것은 『진도북춤』. 이 춤들은 작품의 전개를 위한 밑그림이다. 분주함 속에 각자의 스피드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전통의 흔적이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생각의 단편을 담은 움직임, 존재의 확인을 위한 외침 등이 전개된다. 혼돈, 분주, 정보의 홍수 속에서 무용수들은 아주 천천히 팔과 다리를 들어 올려 자신의 시간과 공간을 만든다. 이것은 속에 담고 있던 호흡을 통해 전통의 흔적이 누구에게나 배어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전통은 현대와 등진 것이 아닌 상호보완적이고 협력적이라는 것이 안무자의 시선이다. 혼돈 사이의 침묵, 빠름 속에 느림이 전통과 현대의 대비로 보여 진다. 무용수들 사이를 가르며 이어진 장현수의 움직임, 소리, 연기가 무대를 장악했다 .
1장의 중심을 요약하면 정체성의 기저에 깔린 전통의 요소들을 한국춤의 선과 형태로 끄집어내 재구성을 시도한 점이다. 안무자가 제안하는 대로 작품을 쫓아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고 그 의도대로 읽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전통과 현대라는 키워드를 머릿속에서 지우고 작품을 본다면 어떻게 감상될 것인지 생각해보았다. 어떤 주제를 대입해도 적절한 해석이 가능한 작품으로 생각된다. 즉 춤과 가미된 영상, 숙련된 무용수들로 채워진 무대, 감각적으로 다듬어진 완성체의 형태를 이루고 있지만 주제의 명료성을 만들고 있지 못하다.

제2장 ‘세계여행의 추억’은 소제목에서 주는 기대와는 다른 이미지로 진행된다. 스크린을 가득 메운 것들은 빼곡한 인파의 수영장, 비상을 준비하는 펠리컨, 폐허가 된 도시에서 쓰레기를 줍는 아이들, 자연의 흔적, 사람의 흔적, 사람들이 만든 모순의 결과물이 아주 느릿한 움직임으로 채워졌다. 그리고 김미애는 아주 천천히 호흡으로 꽉 찬 한 걸음을 스크린 앞으로 옮긴다. 무대 중앙에는 느리지만 지향을 가진 움직임의 무용수들이 사선으로 늘어선다. 이들의 손에는 커다란 봉지를 움켜지고 있다. 그 속에 쓰레기가 들었는지 여행의 기억이 담겼는지, 어떤 흔적으로 꽉 찬 그 봉지 속의 덩어리에 대해 여러 상상이 가능하다. 바쁜 현대의 시간에 보따리를 가득 채우고 아주 느릿하게 어디론가 움직이는 김수자의 작품이 연상되었다. 무대 위에 느릿한 움직임은 전통과 현대에 대해, 또는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대립의 결과물에 대해 은유적으로 표현하였다.

제3장 ‘포옹’은 앞서 해체와 재구성 했던 각각의 요소들을 하나로 융합하는 장이다.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가 무대에 가득 채워지고 음악의 흐름을 따라 작품은 최종점을 향한다. 이것은 안무자가 작품을 맺기 위해 가장 쉬운 방법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 음악이 가진 반복과 점증적 증폭의 흡입력은 이미 공공연한 것이어서 이 음악을 선택하여 재창조의 변별력을 선보이거나 또는 볼레로를 사용한 어떤 당위성을 갖지 못했다. 무대에서 보여진 움직임의 파편들을 늘어놓든 그 사이에 큰 소리로 추임을 더하든 볼레로가 흐르는 무대의 결말일 뿐이다. 해석의 여지가 있지만 1장에 들어있는 이 작품의 오리지널리티를 위한 고민이 3장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다만 포옹의 중첩된 이미지들을 구성하여 영상으로 표현한 것만큼은 관록으로 만들어낸 일정수준 이상의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몽탈보의 작품에 춤과 영상을 접목한 상상력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98년 내한 했던 작품 『파라다이스』의 신선한 기억은 선명하다. 작년 초연에 이어 올해 『시간의 나이』를 보기 전에 몽탈보의 작품들을 찾아보았다. 영상을 이용한 무대의 상상력을 확장하는 작업들을 계속 발전 시켰고 그것이 분명한 자기 무대로 확립되어 있었다. 『파라다이스』에서는 흰 스크린 사이를 찢어 무대 위의 인물과 영상 속의 인물, 동일 캐릭터가 서로 마주보며 다양한 만남들을 연출했다. 이런 구성은 동일한 시간에 다양한 공간, 상상의 영역을 입체적으로 팽창하는 매력이 있다. 참 신선하고 설렌 기억으로 남아있다. 『시간의 나이』와 굳이 비교를 한다면 『파라다이스』는 스테레오, 『시간의 나이』는 모노. 생각의 깊이가 덜하거나 가볍게 작품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정열의 차이. 몽탈보의 시간의 나이가 반영되었다.

* 김동호 안무의 『봉인된 시간』(4월19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한국무용제전」)
‘봉인된 시간’은 잊어서는 안 될 현재진행형의 사건에 관한 이야기다. 사건 속에 소멸된 귀한 생명에 대해, 또 그 속에 담겨있을 수많은 기억에 대해 상기하자는 작품이다. 이것이 주제이며 전개의 골격을 이루는 구조다. 작품의 시작은 무대 뒤편에서 객석을 향해 가로놓인 길을 따라 앞으로 향하는 작은 종소리와 함께 진행된다. 『봉인된 시간』을 보며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창작춤에서 보여지는 도입의 관해서다. 어느 작품이든 첫 도입의 시점에 의도하는 정황을 펼쳐놓고 춤을 시작하지 않는 작품은 드물다. 그러나 이때 분위기 또는 조명, 음악에 기대어 시간을 흘려보내는 구태적인 작품들이 부지기수다. 『봉인된 시간』도 그런 측면에서 마찬가지다. 거기에다 ‘지금부터 슬퍼하고, 마음아파 할 시간입니다’라고 이야기 하듯 관객의 감성을 유도한다. 이 도입의 상황을 짚는 것은 구태를 넘는 자연스러움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회적 이슈가 담기거나 큰 아픔을 가진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꺼낼 때는 작품을 통해 생산될 메시지와 파장이 있는 울림이 만들어 질 것을 목표로 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잊어서는 안 될 이야기여서 꺼낸 이 작품은 다시 꺼낸 시점이 3년이 지났고, 그 시간만큼의 깊이감이 부족했다.
『봉인된 시간』에서 하나 주목할 것은 공간의 분할이다. 조명을 이용해서 작품의 초반 중심을 가르는 빛, 무대 중간에서 푸른 빛깔로 바닥에 퍼트린 빛, 양 측면에서 무대를 관통해서 빛 아래로 만든 공간은 인상적이다. 생사의 경계, 두려움, 분리된 현실, 새로운 생명 등으로 유추되는 이 구성은 유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