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무기

* 홍은주 안무의 『기억의 침묵』(4월14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무대 앞에 흰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다소곳이 앉아 있다. 그 뒤 샤막(투명막) 너머엔 여러 소녀들이 모로 누웠거나 엎드린 채로 뒤엉켜 있다. 일본군위안부의 아픈 기억이 억만 근의 앙금과 상처로 남아 무너져 내린 육신이다. 가슴을 헤집는 여자의 흐느낌과 한숨 소리에 소녀들이 움직인다. 소녀들은 사람 크기의 천 인형을 하나씩 안고 몸을 일으킨다. 무대 앞에 앉아 있던 소녀도 일어난다. 샤막이 오르고 소녀들은 인형을 어르고 달래며 논다. 무대 뒤쪽에 가로로 놓인 단 위로 아버지의 목말을 탄 소녀가 양산을 받쳐 들고 지나간다. 소녀들 가슴에 벙그는 꽃망울은 그러나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임을 기타가 울먹이며 일러준다.
무대 뒤 단 위의 소녀는 발버둥치며 매달리지만 아버지는 고개를 숙인 채 두고 나간다. 발걸음은 한 맺힌 창(唱)을 멈칫 멈칫 따라간다. 소녀들은 엎드린 채 원망하듯 하늘을 바라본다. 하소연하듯 팔을 뻗었다가 이내 입과 귀를 막는다. 무릎을 구부린 자세로 어기적거린다. “위문공연… 시모노세키… 마이코(舞子)… 내 나이 14살….” 점점이 피맺힌 넋두리에 소녀들은 자지러진다. 경련하며 입을 벌린 채 온몸을 손으로 어루만지다 어쩌지 못하고 쓰러진다. 1평방미터 남짓한 정사각형 7개를 조명으로 비춘다. 사각형에 갇힌 일곱 소녀는 차폐된 만행을 처절한 몸짓으로 폭로한다.
“~ 아래가 다 헤져요. 피가 쏟아지고….” 소녀들은 군홧발자국 소리에 치를 떤다. 손을 등 뒤로 한 채 치욕을 감당한다. 인형들은 박제된 영혼 마냥 축 늘어진 채로 공중에 매달려 있다. “~ 물 젖은 삼베 찢고 넋 배를 몰아가요. 그러니까 이건 아주 오래된 오늘 이야기.” 슬픔으로 저며진 상처는 분노로 자꾸 덧난다. 흰 저고리에 옥색치마를 곱게 차려입은 인형이 공중에서 내려온다. 소녀는 잃었던 ‘나’를 만난 듯 서럽게 껴안는다. “밤마다 꾸는 꿈은 하얀 엄마 꿈.” 「찔레꽃」 기타 소리에 소녀들이 선채로 한 걸음씩 돋아 올랐다 내려가며 차례로 머리를 숙인다. 젖은 박수와 목멘 함성이 객석을 적신다.

* 「정신혜의 춤 청정(靑請)」(4월5일 국립국악원 예악당)
공연장은 방(房)이다. 신발을 벗어 놓고 들어간다. 신발은 댓돌 대신 번호가 매겨진 사물함에 넣는다. 속된 세상에서 성스러운 장막 안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객석은 계단식이다. 무대도 온돌이다. 사랑방처럼 아담하고 정겹다. “들판에 꽃 만발할 때 앞 못 보는 아버지와 나갈 때면 나를 청이라 불렀지….” 여성의 판소리 가락에서 꽃향기가 물씬 풍긴다. 여성 무용수 둘이 그 향기를 쫓아 날아들 듯 등장한다. 홀로 남은 무용수는 두 손을 하늘하늘 펼쳐 들고 부드럽게 돌며 나비로 난다. 버선코를 세웠다가 디디며 사뿐사뿐 걷다 뒤꿈치를 들어 바삐 쫓는다. 수줍은 듯 들썩이는 어깨에선 순결한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애절한 피리소리가 바람이 돼 화면 속 꽃잎을 흩날린다. 전립을 눌러쓰고 전복을 입은 가녀린 여인의 차림새가 자못 비장하다. 모로 앉아서 상체를 숙이고는 팔을 이리 저리 휘저으며 모진 운명에 탄식한다. 바닥에 놓인 칼을 집어 들자 일진광풍이 몰아친다. 음악이 뜀걸음으로 앞서자 몸짓이 기민하게 따른다. 칼을 내뻗고 돌리는 기세가 당차고 앙칼지다. 칼의 목이 꺾이고 펴질 때마다 나는 찰칵이는 고리 소리가 차디차다. 세 명씩 갈라선 두 편 가운데 선 주인공이 칼을 어깨와 머리 위로 올차게 휘돌린다. 야무지게 칼을 후리고는 인당수에 뛰어들 듯 ‘찰칵찰칵’ 고리 소리를 유언처럼 남기고 사라진다.
“그녀에게 내 말을 전해주오!” 바리톤이 하프와 첼로 소리를 붙잡고 심봉사의 애끊는 심정을 사해(四海)에 고한다. 판소리가 ‘사부가(思父歌)’로 답한다. “아버지는 눈을 떠서 밝은 세상을 보고 계시는가 불효 막심 이내 심정.” 주인공은 한삼자락을 늘어뜨린 채 천천히 돌다 앞으로 펼쳐 낸다. 바닥에 앉아 상체를 숙인 채 흐느끼듯 들먹인다. 체념한 듯 무심한 표정이 비통함을 더한다. 스스로 살아 몸짓을 부르고 이어가는 춤이 가슴을 때린다. 애절한 춤이 하늘을 감동시킨 듯 바리톤은 “나는 수풀 우거진 청산에 살리라”고 부녀의 상봉을 노래한다. 심청은 연화무 한가운데서 연꽃을 들고 꽃 중의 꽃으로 되살아난다.

* 메타댄스프로젝트, 최성옥 안무의 『카르미나 부라나』(4월14~15일 대전예술의전당 아트홀)
무대는 화려하다. 40명의 합창단원들이 양쪽으로 갈라서 무대를 호위한다. 안개가 피어오르는 바닥엔 서기가 돈다. 토성의 띠처럼 가운데가 뚫린 원반이 공중에 떠서 은은하게 빛난다.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서곡은 천둥처럼 장엄하다. 공중에서 빛나던 원반이 바닥으로 내려앉고 한가운데서 남녀가 신비롭게 깨어난다. 봄은 관대하고 몸짓은 활발하다. 태양은 연두색으로 붓질하며 새 것을 축복한다. 합창과 오케스트라 소리는 은하수 모퉁이까지 신록을 뿌려낼 듯 우렁차고 풍성하다. 사람들은 멀리 뻗고 힘차게 돌고 높이 오른다. 홀로 그리고 여럿이 움직이지만 은밀한 관능은 둘을 향한다.
7개의 탁자에 남녀가 쌍쌍이 올라 춤춘다. 바리톤의 노래는 남녀의 행로를 예고하고 경계하듯 엄숙하다. 구애하는 남자들의 몸짓이 절실하다. 몸을 비틀고 꺾는 여자들의 몸짓은 요염하다. 여자들이 닿을 듯 다가섰다 물러날 때마다 남자들은 머리를 싸매고 바닥을 구른다. 사랑을 향한 의지는 불같고 사내들의 싸움은 맹렬하다. 승자들은 둥글게 배열된 탁자 위를 오르고 내리며 마시고 취한다. 위험하고 퇴폐적인 유희로 남녀가 어지럽게 얽힌다. 소수의 풍요는 교만하다. 그늘에선 가난한 소망이 이끼처럼 자라고 요정들은 비천한 사랑을 응원한다. 풍요가 살찌고 가난이 메말라가면서 세상은 칠흑 같은 혼돈으로 빠져든다.
바리톤이 어둠을 걷어낸다. 튼실한 상체를 드러낸 남자가 걷힌 어둠을 땅에 묻고 빛의 춤을 춘다. 빛살 같이 환한 소프라노가 남자를 기다리는 여인의 몸짓을 어루만진다. 흰색 하의를 입은 남자의 춤은 크고 힘차다. 거역할 수 없는 그의 몸짓에 거악이 스러진다. 영웅의 개선을 축하하는 합창에 우주가 춤을 추듯 화면 속에선 큰 원이 음악에 맞춰 진동한다. 남녀노소가 쏟아져 나와 정의로운 평화를 찬양하고 차별 없는 풍요가 오래 가길 기원한다. 하늘이 ‘예스’라고 응답하듯 음악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고 공중의 원반은 금색으로 빛난다. 세상은 환희에 찬 몸짓으로 눈부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