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평

* 31회 「한국 현대춤작가 12인전」(4월4~9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한국 현대춤작가 12인전」은 작년에 30주년을 맞이하여 대부분 60~70대의 원로급의 무용가들을 초청하여 우리 춤의 역사성을 되짚어보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올해는 그러한 의미를 딛고 이후 세대의 춤으로써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려는 의지를 표명하였다. 「한국 현대춤작가 12인전」이 상대적으로 젊어졌다는 의미다. 4월4일부터 9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있었던 「31회 한국 현대춤작가 12인전」에는 김보라, 정명훈, 고현정, 박종현, 우혜영. 최진욱, 예효승, 김용걸, 정은혜, 한칠, 장은정, 이연수(프로그램 순)이 출연하였다. 그중에서 우리 무용계의 원로층과 비교적 젊은 세대 사이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정은혜, 이연수, 장은정을 조명한다.

『기다림』은 정은혜에게 남다른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1979년 초연 때는 대학시절을 마무리하는 졸업작이었으며 1982년 재공연 때는 무용계에 첫 발을 내딛는 데뷔작이었다. 그리고 많은 것을 겪고 이룬 현재(2017년)에 이르러서는 초심을 되돌아보는 작품이기도 하다. 임동창의 음악을 반주로 한 『기다림2』는 삼십여 년의 세월에 담긴 삶의 자취를 되돌아보면서 여전히 봄을 기다리는 자신을 투영한다.
정은혜는 무대 중앙을 덮은 커다란 검은 천에서 머리와 어깨만 드러내고 있다. 커다란 천 끝자락에는 버선발이 배꼼이 나오는데 마치 정은혜의 상체로부터 확장되어 연결된 하체처럼 보인다.-물론 다른 이의 하체다. 서고 눕고 엎드리고 허리를 활처럼 젖히는 등 갖가지 몸짓을 취하는 동안 몸이 서너 배는 늘어난 듯한 착시는 계속된다. 다만, 하체를 맡은 젊은 무용수가 상체의 연륜을 이어 받지 못했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농후한 밀도를 지닌 상체와 대충 모양만 짓는 하체 사이에 괴리가 두드러졌던 것이다.
후반부에는 천을 장막처럼 세워 넓게 펼친다든가 천을 감아 드레스처럼 보이게 하는 등의 변용적 활용이 전개된다. 30여 년 전에는 상당히 인상적이었을 테고 현재에도 충분히 흥미로운 천을 활용한 움직임 탐구가 돋보인다. 마지막은 손을 위로 뻗으면서 자기만의 봄을 기원하는 몸짓으로 맺어진다.

이연수의 『드로잉(Drawing)』은 영상과 춤의 콜라보가 인상적이다. 영상에는 대나무 숲 사이로 흰 원피스차림의 누군가가 비춰진다. 걷는 발로부터 시작하여 차츰 몸의 다양한 일부가 힐끗힐끗 보이더니 마침내 이연수임이 드러난다. 영상 속의 자연친화적인 움직임은 곧바로 무대에서 자연스러운 순환성을 지닌 움직임으로 실제화된다.
사실, 영상 속의 움직임과 무대 위의 움직임은 서로 대립되기보다는 상호보완적으로 이연수의 춤 메소드를 그려나갔다. 영상 속의 움직임이 세분화된 클로즈업으로 훑어졌다면 무대 위의 움직임은 입체적인 공간감을 여실히 드러냈던 것이다.
시각적으로 화려한 춤이 아닌, 단전(丹田)으로부터 나오는 근원적인 그러므로 자연스런 몸의 움직임은 몇 해 전부터 이연수의 춤 메소드로 자리 잡았다. 마지막까지 흐트러짐 없이 차분하게 이어진 순환적인 호흡으로 인해 구도자적인 분위기가 공간을 지배한다. 대나무 숲과 흰 원피스가 그러한 움직임의 미학을 보다 깊고 깔끔하게 우러나오게 한다.

『되기, 되기, 되기 - 앎』에서 장은정은 몸에 대한 탐구를 통해 스스로를 알아가고 찾아가는 작업을 펼친다. 그녀는 작년에 『비밀의 정원』이란 작품을 통해 한 단계 높은 예술적 성취를 이루어냈는데, 이번 솔로 역시 그 상승세를 이어받고 있다.
빠르게 타진하는 장구 장단이 흐르는 가운데, 전신에 노란색 천을 뒤집어 쓴 장은정이 꿈틀거리면서 중앙으로 기어나간다. 그러고는 이리저리 몸을 틀고 풀고 꼬면서 바나나, 고깔, 듀공, 물개, 블롭피쉬를 닮은 형상을 만들어낸다. 특정한 형상을 의식해서 만들어낸다기보다 전신에 천을 뒤집어 쓴 채로 움직이는 모양새가 여러 가지 형상을 떠오르게 하는 것이다. 이는 천 안에서 단련된 신체를 창의적으로 활용하기 때문에 가능하리라 본다.
점차 손, 다리, 얼굴 등 신체의 일부가 천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더니 마침내 몸의 대부분이 나타나게 된다. 그럼으로써 온몸을 감싸던 천은 훌렁거리는 독특한 디자인의 드레스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밀도와 에너지를 갖춘 유희적인 솔로가 무대 위에 새겨진다. 유희적이라고는 하나 자신을 투영하고 있기 때문인지 오랫동안 독립적으로 활동해온 50대 여성무용가의 패기와 한(恨)을 내재하며 스스로를 보듬어가는 치유의 뉘앙스까지 담고 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함께 우리 무용계에서 그녀가 겪어야했던 무게가 얼마 만큼이며 또 그것을 어떻게 감내해왔는지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솔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