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무기

* 현대무용단-탐, 조은미 안무의 『보이지 않는』(4월6일 이화여대삼성홀)
신록이 나날이 짙어진다. 이미 벚꽃은 만개했다가 낙화. 자기를 피게 했던, 가장 믿었던 봄비와 봄바람에 속절없이 스러졌다. 비와 바람의 배신. 그냥 두면 하루라도 세상구경 할 것을, 이제 막 피어난 발그레한 앳된 꽃마저 순간 허공으로 날려버린다. 잔혹한 배반. 되려 예쁠 때 날아가 버린 것이 애절 할 것인가. 한 온천마을의 늙은 벚나무는 꽃을 피우기는 하지만 달고 있을 힘이 없어 꽃은 반나절 만에 쏟아져 내린다. 늙은 나무는 꽃 피우고 남세스러워 부르르 몸을 떤다는데 보았는가.
공연 제목이 『보이지 않는』이다. 보이지 않는 걸 보러 이화여대에 간다. 이대 교정에 들어가는 것이 몇 년 만인가. 옛날 한국무용 전공 여학생과 미팅 했던 기억이 난다. 이름도 얼굴도 떠오르지 않지만 어깨까지 내려온 머릿결과 무릎길이의 스커트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그건 내 청춘의 편린. 내 청춘은 이젠 보이지 않는다.
당신, 아직 청춘인가? 돌아서면 늙고 추해질 것이다. 젊음이라는 걸 젊은이에게 준다는 건 너무나 사치스럽고 감당 못할 일이라고 누가 말했다던데, 그건 그저 어떤 늙은이의 불같은 질투. 그러나 마음도 욕망도 늙지 않는다. 조르바가 이런 얘기를 한다. - 우리 마을에 다 늙은 할망구가 있는데 건너 마을 총각을 보고는 홀딱했지 뭐야. 그 총각이 올 때면 생기가 돌아서 온 얼굴에 연지곤지를 바르는 거여. 그래서 내가 ‘할망구가 총각 올 때마다 분칠을 한다’고 노래를 부르고 다녔지, 그 할망구가 나에게 욕을 퍼부으며 소리질렀어 ‘널 저주한다. 죽어서도 널 저주하겠어. 영원히’ - 마음은 늙지 않는다. 살아있는 한 희망이 있다는 얘기는 살아 있는 한 욕망한다는 얘기. 욕망은 지치지도 않는다.
빗소리에 첼로소리가 섞이며 공연이 시작된다. 첼로의 반복음 속에서 7명 댄서들은 테이블을 중심으로 모인다. 댄서들의 자질이 특출하다. 우수한 신체조건에다가 잘 훈련되어 있다. 객석에는 빈자리가 없다. 무용단이 오랜 시간 깊게 뿌리내렸음의 반증. 이렇게 좋은 무용수와 함께하는 안무가는 행복할 것이다.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좋아하는 시라며 소개한 건 하이네의 「찬란한 오월(Im wundershOnen Monat Mai)」. 슈만의 연가곡집 「시인의 사랑(Dichterliebe)」 첫 곡으로 알려져 있는 아름다운 곡. 오월이 되면 마음속 사랑도 부풀어터지고 새들이 지저귀고 온갖 싹이 피어난다는 찬미. 그런데 여러 욕망이 피어난다는 건 젊은 청춘 남녀의 사랑에만 해당 되는 건 아니다. NHK의 보도에 따르면 연중 가장 많이 이혼하는 계절은 봄. 심혈관계 환자가 가장 많이 응급실에 실려 오는 시기도 봄. 위험한 계절.
내레이션은 일종의 억압기제로 사용된다. 14명의 무용수는 제각각 춤을 추기도하고 군무로 돌면서 무대를 효과적으로 사용한다. 작품은 현대음악 한편을 시각적으로 재배치 한 것 같다. 댄서가 무대를 가로 지르면 마치 클라리넷이 쭉 소리를 뽑아내는 듯하다.
사랑도 청춘도 욕망도 보이지 않는다. 어린왕자의 여우가 얘기하듯,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기’때문에. 우리는 보이는 세계에 살고, 보이는 걸 소유하지만 진정 바라는 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뿐. 스키니진, 스포츠카, 명품옷, 멋진 몸매를 원하지만 진짜 바라는 건 젊음, 열정, 자유, 사랑!
저들이 춤추며 찾는 그 무엇은 무엇인가. 그들의 춤조차 순간 사라져 다시는 보이지 않는데. 그 잡히지 않고 다시 볼수도 없는 것으로 또다른 보이지 않는 것을 찾으려 하는 아이러니. 그 무언가 보이지 않는 것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무언가 잡으려 애쓰는 청춘의 모습을 본다. 그게 사랑이든 자유든 그 무엇이든.

* 안다미로커아트컴퍼니, 김정환 안무의 『책 읽어주는 남자』(4월4/11/18/25일 성균소극장)
성균소극장에서 「책읽어주는 남자」를 보았다. 연기자 한 명과 댄서 7명이 펼치는 무용과 연극의 혼합작품. 초반은 무용이 주도. 청춘과 사랑을 재기발랄하게 보여준다. 극이 중반을 넘어가며 연기자 한 명이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춤은 슬쩍 뒤로 빠지며 BGM처럼 기능한다. 관객들의 호응은 뜨거웠고 댄서들도 힘있게 춤춘다. 이 작품에서 머릿속에서 그어놓은 여러 경계가 무너진다. 구분짓기를 좋아하는 습관은 어느새 이렇게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저건 춤인가 몸짓인가. 저건 춤인가 장난인가. 이 작품은 연극인가 춤인가. 젊은 출연진과 관객들은 그런 헛된 질문을 하지 않을 것이다.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을 받는 마당에 무슨 허공에 줄긋기인가. 젊음에게 경계는 없다. 나는 공연 중에 내 앞줄 젊은이의 하염없이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고 말았다. 한 늙은이의 청춘에 대한 회상과 상처 한 아픔에 대해 왜 이 젊은이가 격하게 공감할까. 그 어떤 순수함의 발로일까. 나는 그 젊은이가 슬퍼하는 것에 슬픔을 느꼈다. 저렇게 확 달려들 듯이 감동하는 것도 청춘의 특권이리라.

여의도 한 영화관에서 「댄서」를 보았다. 여기서도 청춘의 뒷자락을 본다. 우크라이나 시골에서 자라나 영어 한마디 못배운 채 홀로 런던에 간 세르게이는 타고난 천재성에다 엄청난 연습을 보탠다. 어린나이에 로열발레단의 주역무용수가 되고 스타가 된다. 그러나 곧 그의 내면은 무너져 내린다. 그는 외롭고 고통스럽다. 버림 받고 울부짓는 짐승같다. 점점 돌발행동은 도를 넘어간다. 그는 발레단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온다. 온갖 가십과 비난 속에 자신의 진심을 한편의 영상에 담는다. 유튜브에 소개된 이 영상은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고 「댄서」라는 다큐 영화를 찍게 만들었다. 영화에서는 그의 이야기를 잔뜩 하고 이 춤을 보여준다. 그의 스토리를 알고 춤을 보면 더 감동적이고 공감이 되는 걸까. 아니다. 전혀 몰라도 그 춤만으로 그의 상처와 외로움과 열망에 공감 할 수 있다.
굳이 영화를 안 봐도 된다. 유튜브에서 찾아보면(「take me to the church」) 된다. 그의 점프는 고점을 찍고 떨어질 지점에서 한 번 더 앞으로 밀고 나간다. 짜릿하다.
세르게이가 어릴적 우크라이나 댄스스쿨에서 춤출 때 배경음악으로 사용한 것은 파바로티가 부른 「카루소」. 스타가 되고 다시 그곳을 찾아 같은 음악에 춤을 춘다. 세르게이는 어릴때 이 곡을 ‘털보 아저씨의 노래’ 라 불렀다고 선생님이 어린시절의 그를 회상한다. 카루소는 이탈리아 나폴리 출신의 전설적 테너. 이미 고인이 된 지 오래. 그를 소재로 노래를 만들어 발표한 나폴리의 가수 루치오 달라도 이미 고인. 이 노래를 전 세계에 히트시킨 파바로티도 이젠 고인. 그러나 아직 젊은 세르게이는 이 노래에 춤을 춘다.
춤과 음악과 시는 말이 많아질수록 본질에서 벗어난다. 어떤 말기 암환자가 이런 얘기를 한다. ‘티비에서 어떤 춤과 노래를 보았는데 순간 그 예쁘고 아름다워서 아픔을 잊고 행복감을 느꼈어요.’ 인간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끼고 공감한다. 이역만리 한 청년의 춤에서 아픔과 사랑이 느껴진다는 건 기적이다. 대체 인간이라는 건 뭐란 말인가. 영화 전단에 ‘당신은 세르게이 폴루닌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라고 적어 놓았는데, 정말 그 예언대로 그 이름을 기억하고 말았다. 유튜브 영상을 보며 그의 청춘에 공감하시라.

봄날 가듯이 청춘은 흘러간다. 그것을 돌려놓고자 하는 것은 영원한 욕망. 그러나 천지개벽 후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여러 연구기관에서 수명연장과 함께 몇 살까지는 청년이라는 둥 하지만 그건 다 헛소리. 내 몸은 내가 안다. 나는 젊지 않다. 봄날 춤 몇 편을 보며 봄바람처럼 흘러간 보이지 않는 청춘을 생각한다. 그러나 봄밤은 김수영의 시처럼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이다. 봄날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