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평

* 국립현대무용단 김보람·김설진·김용걸 안무 『쓰리 볼레로』(6월2~4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는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과 더불어 안무가에게 영감과 도전의식을 불어 일으키는 음악으로 등극해 있다. 이는 각각의 음악을 사용하여 만든 바슬라브 니진스키의 『봄의 제전』(1913)과 모리스 베자르의 『볼레로』(1960)가 초연 당시 시대를 앞서가는 작품성으로 큰 논란을 일으켰던 것에서 상당부분 기인할 것이다. 이후 세기를 넘기면서도, 안무력을 갖추고 혁신적이라고 자부하는 안무가들이 끊임없이 ‘봄의 제전’이나 ‘볼레로’ 음악을 건드려 왔다. 전 세계적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버전이 양산되고 있는 가운데, 우리나라에서도 국수호, 안성수, 김남진 등 적지 않은 안무가들이 이에 동참하였다.
하지만 ‘봄의 제전’이나 ‘볼레로’ 같이 유명한 음악을 사용하는데 있어서는 대단히 신중해야 한다. 너무도 잘 알려진 선율에 춤이 잠식당해 허우적거릴 수 있는 위험부담이 큰데다가, 안무 거장들이 높여놓은 작품에 대한 기대치에 부응하기란 상당히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음악을 사용할 때 결과는 모 아니면 도다. 휘청거리며 가라앉던 지 아니면 새로운 버전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던 지다.
국립현대무용단(예술감독 안성수)이 김용걸, 김설진, 김보람에게 볼레로 음악을 사용한 작품을 의뢰한 ‘쓰리 볼레로’란 기획은 위와 같은 이유로 우려와 기대를 동시에 모았다. 그 베일은 6월2~4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열렸다.

『철저하게 처절하게』에서는 안무가이자 무용수로 활약한 김보람을 필두로, 장경민과 이은경 등 개성있는 무용수 여덟 명이 함께 한다. 모두 하얀색 양복을 갖춰 입었으나 선글라스, 노란색 염색머리, 머리를 감싸는 모자, 높이 묶은 머리, 민머리, 콧수염 등으로 각자의 개성을 드러낸다. 김보람은 힙합을 췄던 경험을 바탕으로 현대무용으로 전향한 안무가답게 독특한 움직임을 전개한다. 몸 전체로 길게 흐르는 선형을 중요시하는 예술 춤에 비해, 꺾고 끊는 듯한 다소 분절적인 동작성을 보이면서 남다른 악센트와 리듬감으로 개성을 짙게 한다.
가장 주요한 요소로서 음악은 원곡을 거의 훼손시키지 않은 상태로 소규모 챔버(chamber)오케스트라에 의해 연주되었다. 전반적으로 음악에 대한 춤의 시각화도 나쁘지 않았다. 다만, 볼레로 음악을 춤으로 실제화 시키는데 있어 리듬감과 악센트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그 이상으로 굵직하게 중심을 잡고 있는 주(主)선율을 놓친 감이 없지 않다. 볼레로 음악은 주(主) 선율을 반복하면서 점진적으로 고조시키는 큰 흐름이 중요하다. 만약 의도된 것이라면 음악을 그에 맞게 획기적으로 변형시켰어야 했다.

김설진의 『볼레로 만들기』는 무대에 여러 장치를 하고 소품을 늘어놓는 것으로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바닥에 장판을 깐 다음에 테이핑을 하고, 스탠드 마이크를 옮겨놓고, 여러 잡동사니들을 이곳저곳에 늘어놓았다. 동시에 무대 뒤쪽으로 여러 사운드를 내는 기계들을 설치하였다. 해체와 재구성을 거친 ‘볼레로’ 원곡은 휘파람, 턴테이블 튀는 소리, 전자음악, 비트로 변형되다가 널리 알려진 웨딩곡과 짜깁기되었으며 드럼이나 전자기타로 색다르게 연주되기도 한다. 거의 재창조되다시피 한 음악은 작품의 색깔을 확립하는데 주요 요소로 자리매김하였다.
장치와 소품 그리고 음악과 음향이 제각각 산만해 보이지만 일련의 틀 안에서 규칙을 가지고 배치되어 있듯이, 다섯 명의 남자무용수들은 각자 움직이면서도 상호보완적인 관계 속에 연결되어 있다. 다섯이 하나의 공간 퍼즐을 맞춰가듯 위치나 행동반경 혹은 정동(靜動)에 있어 어느 정도 조화와 균형을 갖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 무용수가 넓은 공간을 차지하면서 역동적인 움직임을 펼치면 다른 무용수는 낮은 자세로 소극적인 움직임을 펼친다던가 하면서 말이다. 구성적 틀이 다섯 명의 움직임을 관통하기 때문에 제각각 즉흥적으로 움직인다 하더라도 날림으로 보이거나 산만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와 같은 안무는 상당한 감각과 탐구 없이는 실현시키기 어렵다.
『볼레로 만들기』는 ‘볼레로’ 음악을 해체하여 재구성한 결과물을 바탕으로 즉흥과 구성적 틀을 이상적으로 균형 잡은 춤으로써, 세 작품 중 중간에서 중심을 잡으면서 각각을 특색있게 느껴지게 하였다. ‘쓰리 볼레로’란 기획의 가치를 높여주었다는 의미다. 몇 년간 기대만큼의 창작 작업을 펼치지 못했던 김설진이 제자리를 찾아감을 확인시키는 작품이기도 하다.

김용걸의 『볼레로』는 소위 군단으로 일컬어지기도 하는 대규모 발레의 힘을 보여주었다. 37명에 달하는 군무진은 검은 양복에 검은 선글라스를 걸친 채, 날렵한 스텝을 밟으면서 일사불란하게 대열을 변화시킨다. 볼레로 음악과 같은 모태를 가진 스페인 춤을 응용한 동작이 더할 나위 없이 분위기를 끌어올린다. 웅장한 음악을 큰 물결과도 같은 춤으로 표현한 군무진과 함께, 안무가 김용걸이 직접 출연하여 자유롭고 감각적인 춤의 변주를 펼친다. 이미 은퇴한지 꽤 되었지만 파리오페라발레단에 몸담았던 무용수답게 움직임을 가지고 놀 줄 아는 역량을 보여주었다. 여기에, 군무진보다 두 배 이상 많아 보이는 수원시립교향악단의 풀(full)오케스트라가 ‘볼레로’를 연주하는 광경까지 어우러져 강렬한 인상을 심어놓았다. 정석에 가까운 묵직한 볼레로 음악에다가 춤이 주는 감각적인 에너지가 객석을 들썩이게 하였다.

김용걸, 김설진, 김보람은 볼레로 음악이 주는 부담감을 극복하면서 3인 3색의 기대 이상의 수작을 냈다. 국립현대무용단이 ‘쓰리 볼레로’로 이룬 성과는 ‘실력있는 안무가를 선별하여 존중한다’는 기획 및 제작의 본질을 되찾았기에 가능하였다. 이로 인해 큰 의미를 찾기 힘든 소모적인 작품이 아닌, 생산적이고 가치있는 작품들이 실현될 수 있었다. 창작의 방향감각을 상실한 젊은 무용가들에게는 순수한 예술 창작의 가치를 환기시켰으리라 본다.

* 부산시립무용단 김용철 안무 『춤, 인상』(5월25~26일 부산문화회관 대극장)
부산시립무용단은 작년에 김용철 예술감독을 영입한 이래로 두 개의 의미있는 공연을 펼쳤다. 대작으로 각색된 『업경대』로 예술적인 수준에서 매우 깊은 인상을 심어놓은 데다가, ‘소실점이 다른 두 개의 표정’이라는 기획에서 『날의 줄』과 『늙은 여자』란 작품으로 독자적인 방향성에 대한 가능성을 확인시키기도 하였다. 그래서인지 이번 공연에 대한 기대는 꽤 높아져 있었다. 이러한 기대 속에 부산시립무용단의 제76회 정기공연 『춤, 인상』이 6월25~26일 부산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있었다.
『춤, 인상(印象)』은 빛에 따라 여러 형상과 색채를 띠는 인상주의 회화에서처럼, 춤과 그 주변 움직임이 다양한 모습으로 무대를 수놓은 작품이다. 우선, 한국무용의 전통을 이루는 춤들이 여럿 등장한다. 오방처용무와 춘앵전 같은 궁중무, 소고놀이 같은 민속무, 무당춤 같은 제의무, 나비춤과 바라춤과 법고춤 같은 의식무를 모두 망라하여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구성해 놓았다. 군데군데 듀엣이나 군무로 이루어진 창작 춤도 덧붙여졌으며, 춤 주변의 움직임인 줄타기, 태권도, 힙합 등까지 가세하였다. 바로 이런 점으로 인해 하나의 작품이라기보다는 부산시립무용단의 방대한 공연활동을 한데 망라해놓은 한마당처럼 느껴진다.
음악의 경우에도, 황병기의 가야금 연주와 부산시립소년소녀합창단의 노래에다가 서정적인 피아노 선율과 흥겨운 타악 리듬까지 합세하여 작품의 분위기를 한층 돋우었다. 춤과 그 주변의 움직임처럼 폭넓은 음악 영역을 아우르고 있다.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퓨전 한복 역시 작품의 이미지를 보다 선명하게 만들었다. 다만, 김용철 특유의 화려하고 세련되고 감각적인 의상이 재질이나 디자인에 있어 상당히 격하되어 있는데 이는 예산 부족에서 기인할 것이다. 김용철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이므로 그만큼 아쉬움을 클 수밖에 없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부산시립무용단 단원 모두와 함께 하려는 김용철 예술감독의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단원들의 기량을 찬찬히 관찰해 볼 수 있었는데 춤추는 몸의 밀도가 전반적으로 약하다는 점이 눈에 띠었다. 한국무용은 발레나 현대무용처럼 차고 뛰고 도는 화려한 동작기교가 많지 않기 때문에 춤추는 몸의 밀도가 상당히 중요하다. 이는 정중동의 미를 실제화하는 근간으로써 한국무용의 춤사위를 예술적으로 상승시키는데 주요한 요소다.
중간에 카메오처럼 등장한 김용철이 무용수로서 전성기를 훌쩍 넘겼고 근래 들어 훈련이 채 되지 않은 몸으로 움직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 이상으로 시선을 끌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말인 즉, 현역 단원들의 분발이 요구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춤추는 몸의 밀도는 스스로의 한계를 시험하는 훈련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부산시립무용단의 『춤, 인상』은 한국무용의 전통과 창작뿐 아니라 여러 대중적인 움직임과 더불어 음악, 의상 등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는 점에서 버라이어티한, 하지만 다소 산만하기도 한 갈라 공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