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평

* 「대한민국발레축제」 조주현 안무 『동행』(6월19~20일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아주 오래전, 10명의 감독들이 유명 오페라 아리아 10개를 골라 연출한 단편 옴니버스 영화 「아리아 (1987)」를 본 적이 있었다. 데렉 잘만이 감독한 구스타프 샤르팡티에 오페라 「루이즈 (Louise)」의 아리아(Depuis Le Jour)를 배경음악으로 연출한 영화 속 9번째 영상이다. 이 영상속의 아리아는 가난한 봉재사 루이즈가 화가 줄리앙과 동거하며 가난하지만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환희에 찬 선율로 노래하는 장면이다. 오페라 가사와 영상 속의 이야기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순 있지만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행복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한 늙은 여배우, 무대 위에서 핀 조명을 받으며 과거 젊었던 그녀의 연애 시절을 추억하는 흑백의 영상이 교차되는 장면은 장황한 대사 없이 한 여인의 모든 것을 단 6분 여 안에 말해주고 있다. 이 영화를 본 지 20년도 훌쩍 넘은 지금까지 유일하게 기억에 남는 이유는 아마도 죽음을 맞이하는 한 여인의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2017 대한민국발레축제」의 기획공연으로 선정 작 중 하나인 조주현 안무 『동행』은 먼 기억 속에 있던 이 영화의 한 장면을 다시금 소환시키며 안무가의 작품의도에 대한 공감을 얻어냈다. 자신의 외증조모가 남긴 글들 중 「노탄가(老歎歌)」를 소재로, 자신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거쳐 갔을 인생의 지도를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 상징적 이미지들을 오브제와 빛으로 표현했다. 자궁을 상징하는 듯한 무슬린의 백막 안에서 탄생되는 생명을 레오타드를 입은 무용수들의 군무로 시작하며 군무 중심에서 간간이 보여주는 남녀 파드데를 통해 태초부터자손에서 자손으로 이어지는 생명력 그리고 그 속에서 일어나는 희로애락과 삶과 죽음을 간결하게 보여주었다. 어린 단원들을 군무진으로 기용함으로써 죽음보다는 계속 이어질 세대에 대한 비중이 더 컸지만 그로인해 연기적인 면에서 원숙미와, 정작 이 작품을 바라보는 주체가 누구인지가 모호하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전반적으로 파이프오르간 등에 맞춘 노랫소리와 그에 걸맞게 오브제로 쓰인 백막은 종교적 숭고함마저 느끼게 했는데, 간헐적으로 쓰인 장고 장단 등은 단지 국악을 사용한 것에 대한 의의 보다는 고동소리와 같은 생명력에 대한 표현을 한국적으로 풀이했다는 인상이 더 컸다. 특히 『동행』과 함께 기획공연으로 선정된 서울메이트가 올린 김세연 안무의 『죽음과 여인』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죽음’에 대한 두 안무가의 해석을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시간이기도 했다. 한국의 창작발레는 크게 서구적인 색채를 추구하거나 한국적 소재를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나눌 수 있다. 이 두 가지가 적절히 배합된 동시대적 우리의 이야기가 발레소재로서 아쉬운 현실 속에서 조주현의 신작 「동행」은 자신의 개인적 이야기를 통해 아이덴티티를 강하게 어필한다는 점이 가장 눈에 뜨였다.

* 부산시립무용단 김용철 안무 『춤, 인상(印象)』(5월25~26일 부산문화회관 대극장)
2017 부산시립무용단 초연작 『춤, 인상』(예술감독 김용철)은 춤에 대한 주관적인 느낌을 표현하는 대신, 반대로 한국 전통춤이 오늘날의 관객에게 줄 수 있는 “인상”은 무엇일지에 대한 물음을, 중국의 시학(詩學)이라 할 수 있는 당나라 시대의 시인 사공도 (司空圖)가 정의한 「이십사시품(二十四詩品)」을 근간으로 던진 작품이다. 국내에 머무르지 않고 동남아시아 전역에 눈을 돌려 우리 춤의 근간에 눈을 넓힌 안무가의 스케일을 감안해본다면 그리 이래적인 일도 아니다.
춤은 시간예술이므로 춤의 인상이란 지나가는 찰나에 느껴지는 시적 추상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각자의 경험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사람의 시경을 한국 춤에 적용하여 24가지 보편적으로 나눈 것처럼 춤에 적용할 수 있는 6개의 시품을 골라 무대화 했다.
3장으로 이루어진 제1막은 전통을 뒤틀어 맨살이 드러나는 흰색 의상을 입은 군무진과 함께 『처용무』, 『춘앵전』, 『무산향』 등의 복식을 차려입은 무용수들이 한데 뒤섞임으로 표현한 전아(典雅-법도에 맞아 아름답다)로 시작한다. 이후 2인무로 구성된 2장 섬농(-섬세하고 아름답다), 마지막으로 황병기의 가야금 작품에 맞춘 역시 백색의 유려한 군무인 3장 세련(洗鍊-씻어내고 연마한다)으로 1막을 마무리했다.
역시 3장으로 이루어진 2막은 4장 웅혼(雄渾-웅장하고 혼연하다), 5장 소야(疎野-활달하여 예법에 얽매이지 않는다), 6장 광달(曠達-내용의 도량이 너그럽고 크다)로 이루어졌다.
무엇보다도 『춤, 인상』은 제목 그대로 관객들에게 춤을 정의하기보다는 여러 가지 시도, 즉 한 공간에서 대립, 대칭적 시도를 통한 춤의 화학적 반응들을 관객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각자의 해석에 맡기도록 의도했다는 ‘인상’을 받게 한다. 이를 위해 2막에서는 태권도를 응용한 군무나 줄타기와 팝핀 등의 장르의 충돌을 시도했는데, 반면 『업경대』, 『바랏-살(殺)』 등에서 보여준 종교적 제의 그리고 밀교적 미묘함을 그대로 반영하려는 의도는 물론, 자신의 전작을 장면에 차용하거나 그리고 그가 즐겨 사용하는 황병기 음악의 사용 등 김용철의 지향점을 엿보게 되면서도 동시에 국시립 예술 감독으로서 예술적 실험과 관객의 눈높이 사이에서 절충을 고민했었어야 하는 직책상의 아쉬움이 역력해보였다.
24품 중 6품 외 나머지에 대해서도 앞으로 계속 작업을 할 것인지는 아직 미정이라고 한다. 그러나 시도해봄직한 가치 있는 작업이 될 것은 확실하다.

* 「근대무용의 아버지 송범 10주기 추모공연」(6월20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클래식 음악 콘서트장에서 문득,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음악의 레퍼토리는 아직도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등의 시대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규모가 큰 주요 콘서트홀에서도 마찬가지로 동시대 작곡가들의 작품 연주보다는 아직도 한 두 세기 전의 작품 공연이 주를 이루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춤 공연은 다르다. 음악분야와는 반대로 컨템포러리 창작 공연이 클래식 발레나 전통 공연보다 훨씬 더 자주 올려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만큼 춤은 어느 공연예술분야 중 최첨단에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하지만 전통과 동시대를 이어주는 그 중간에 대한 흔적을 쉽게 찾아 볼 수 없다는 느낌 또한 어쩔 수 없다.
지난 20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 오른 「송범 10주기 추모공연」은 이제는 황혼의 길목에 있는 근대춤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하는 시간이었다. 이번 공연에서는 송범의 대표적 레퍼토리를 갈라 형식으로 꾸몄으며 『강강술래』나 『부채춤』같은 신무용 레퍼토리, 『황혼』, 『참회』와 같은 소품, 『그 하늘, 그 북소리』, 『도미부인』과 같은 춤극의 주요 장면 등 총 10작품, 그리고 조택원으로부터 직접 물려받은 『가사호접』까지- 모든 작품은 당시 사용했던 음악 그대로 사용했다. 1970년대 지어진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의 분위기와 맞물려 작품 뿐 만 아니라 공연장의 분위기까지 시대를 거슬러간 듯 한 감흥을 자아냈다. 근대시대로 돌아간 듯한 분위기임에도 송범의 작품은 발레적 내러티브 한 요소와 세련된 대형미를 통해 ‘근대무용의 아버지’라는 프로그램의 부제가 모든 것을 함축하듯이 창작춤의 교과서적 답안을 제시한다. 지금의 눈높이에서 보자면 유행지난 옷과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오늘날의 작풍성향이 확연히 변화되었지만 오히려 지금의 창작 작품들보다 대하기가 훨씬 편했다.
마침 20일은 융복합 공연축제인 「파다프(PADAF)」의 개막일이기도 했다. 오늘날 동시대 무용가들의 고민은 ‘관객과의 소통’이라고 한다. 하지만 춤에 대한 인식이 전무하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웠던 시대임에도 그 비싼 입장료를 지불하고라도 최승희나 조택원 등의 춤을 보러 극장 앞에 장사진을 이루었던 시대를 떠올린다면 오늘날의 고민은 무언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무언가를 놓치고 있어서 인 것 같다. 혹은 ‘예술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잡으려는 무리수가 이러한 고민을 만드는 것 일 수도 있다. 연세 지긋한 어른들이 객석 대부분을 차지한 한 원로 무용가의 추모 공연장으로 발길을 옮긴 이유는 동시대에서 찾을 수 없는 고민을 과거의 것에서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한 가닥 희망 때문이었다. 전통과 창작춤의 맥을 잇는 발판인 근대춤의 공연은 송범의 은퇴와 더불어 그 막을 내렸다. 온고지신이라는 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며, 꼭 교육적인 차원이 아니더라도, 아직도 근대 춤은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며 감동을 줄 수 있음을 이번 공연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하였다. 근대춤의 계승 없이는 창작춤의 발전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마사 그레이엄의 어법이 구식이라 해도 여전히 세계적인 극장에서 유명 단체들을 통해 올려지고 있듯, 앞서간 세대가 보존하고 새로운 세대에게 물려주어야할 이 같은 공연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