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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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證言: 演出家(연출가) 朴珍(박진) 선생이 분노한 Sai Shoki(崔承喜)
新舞踊(신무용) 30주년 자축의 밤’에서 |
1956년 3월 21일 이날은 일본인 무용가 石井漠(이시이 바쿠)가 경성공회당(京城公會堂)에서 신무용이란 이름의 춤을 선보인 30주년이 되는 날이어서 나는 소공동에 있는 치대(齒大) 소강당에서 30주년 자축회를 가졌다.
축배에 앞서 나의 인사말이 끝나자 갑자기 거나하게 취한 연출간 박진 선생이 별안간 큰소리로 “그러니까 이 모임이 최승희를 기념하는 밤이다 그 말인가. 샤이 쇼오키!(최승희의 일본식 이름) 친일파 그년을 왜 우리가 기념한다는 건가?”
완전히 이성을 잃고 교양 없이 소란을 피웠다.
마침 곁에 같이 앉아 있던 이헌구(李軒球) 선생이 그를 잡아 앉히면서 “이 사람 취했군. 샤이 쇼오키가 당신 버리고 가버렸나 왜 이래!” 하는 유머로서 분위기를 가라앉혔지만 나는 오래도록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 얼마 후 나는 명륜동 뒷골목에 있는 마해송(馬海松) 선생 댁으로 놀러갔다가 일본서의 최승희 무용 공연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그 프로그램은 崔承喜란 한자명(漢字名) 위에 영문자로 커다랗게 ‘Sai Shoki’라고 일본식 발음 토를 달고 있었다.
마 선생은 나무라듯 “「崔承喜」라고 쓰면 일본 사람은 샤이 쇼오키라고 읽고, 조선 사람은 최승희라고 할 텐데 왜 이렇게 했는지 모르겠어? 이래서 일본서 공부하던 유학생이나 젊은이들이 배신감(背信感)을 느껴 모두 등을 돌렸지. 그날 밤 박진 씨의 분노를 나는 이해해요. 그는 정직한 사람이니까. 솔직하게 표현한 것이지” 하였다.
나는 하마터면 이 엄청난 우리 조선 사람의 마음을 알지 못한 채로 그리고 박진 선생을 이해하지 못하고 죽을 뻔하였다.
- 글·趙東華(조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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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본지 1997년 3월호 이 한 장의 사진 ‘신무용 30주년 자축회장’ 참조
[본지 2001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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