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살롱

전시장 그림 옆에 붙은 설명서에는 때로 빨강 또는 노랑 표식이 붙어있다. 작품이 팔렸다는 표시다. 별다른 직업이 없는 전업 화가는 이 스티커가 많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작품이 인정받았다는 상징이자 다음 작업을 위한 물적 기반이 충분해진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19세기까지 작가들은 귀족이나 부호 등 후원자의 도움으로 작품 활동을 하는 경우가 대다수여서 미술시장의 기능이 그리 크지 않았다. 물주에게 소속돼 주문 생산을 하면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했다. 20세기 들어 미술은 자본주의 사회의 총아로 등극했다. 요즘은 수백 억 원 짜리 작품도 쉽게 팔린다. 올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는 이렇게 천정부지로 오르는 미술품 가격에 대한 우려 목소리까지 나왔다. 전 세계 미술관이 서로 소장하려고 경쟁하는 체제에서 소수 인기작가의 스튜디오는 거의 대기업 수준을 자랑한다.
지난 달 서울 서촌에서 열린 한 전시회에서 수상한 표식을 발견했다. 빨강 스티커들 사이에 검정 스티커가 몇 개 눈에 띄었다. 갤러리 291에서 개최한 「김종숙 전-그래도 속초다」는 50여 점 작품이 고르게 인상적이었다. 주인장인 임현자 씨는 “작가가 도저히 팔 수 없다며 자기가 소장하겠다고 저렇게 검정 표시를 해놨다”고 설명했다. 그 자신이 화가로 제주도 풍경만 30여 년 그리며 사진작가 김영갑(1957~2005)을 후원했던 임 씨는 “이런 작가는 처음 봤다”고 혀를 내둘렀다.
김종숙(52) 씨는 속초 화가다. 2년 전, 서울 인사동 아라아트센터에서 「속초다-30년 은둔 화가의 첫 초대전」으로 세상에 얼굴을 내밀었다. 설거지, 우유배달, 음식점 종업원 등을 하면서 오로지 그림 생각만 하고 살던 그를 보다 못한 동창생 2명이 화가 몰래 그림을 싣고 상경해 억지 데뷔를 시켜 화제가 됐다. 놀람의 호평 속에 작품이 다 팔리자 자신을 얻은 화가는 지난 2년 그림에만 매달렸다. 그를 발굴하고 지켜본 미술평론가 박인식 씨는 “오로지 그리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같다”고 말할 정도다.
그림만 그릴 수 있어서 행복했다는 그가 정작 이번 전시회에서 일관되게 표현한 주제는 ‘슬픔’이다. 그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살아 갈수록, 나이 들수록, 이 순간 나와 함께 숨 쉬고 있는 이 세상 모든 것이 애처롭고 슬프다”고 했다. “말로는 표현할 재주가 없으니 그리는 것”이라며 “너무 아름다워서 슬픈 삶에 손 한 번 얹고 싶다”고 말했다.
그가 검정 스티커를 붙인 「공원」은 누워 잠들어 있는 노숙자의 모습을 담은 유화다. 화면 전체가 잿빛 물감으로 짓이겨진 속에 떠돌이의 얼굴과 손이 밝게 떠오른다. 남루한 저 삶조차 슬퍼서 아름답다는, 그래서 도저히 남의 품으로 떠나보낼 수 없다는 화가의 속내가 마음에 찡하게 와 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