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 동숭문화광장

지난 8월 중순 미국과 유럽 대륙 간 여자골프 대항전인 「솔하임 컵」의 TV중계를 보는 동안 기량 면에서 한국선수들 보다 한수 처지는 미국과 유럽선수들의 경기내용은 큰 흥미를 자아내지 못했다. 선수들의 기량보다는 응원열기와 상대선수와의 신경전, 필승전략 등이 오히려 주목됐다. 이런 상황을 대변하듯 한 신문은 “올 솔하임 컵 주인공은 ‘캡틴 아메리카’”라는 제목으로 미국 팀 단장인 줄리 잉스터(57)를 큰 사진과 함께 ‘선수들보다 주인공’이라고 소개했다.
크리스탈 솔하임 컵을 두 손으로 들고 활짝 웃고 있는 잉스터의 모습은 골프와 가정의 이중 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외유내강의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LPGA 메이저 대회 7승을 포함해 30여개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해 명예의전당에 헌액된 잉스터는 골프선수로는 ‘고령’이라고 할 수 있는 57세의 나이에도 현역으로 뛰고 있다. 20여 년 전 당시 어린 두 딸을 보살피기 위해 시합이 열리는 곳 마다 데리고 다닌 일화는 세계여자골프계의 미담으로 꼽힌다.
선수생활과 가정생활을 성공적으로 이끈 흔적은 큰 사진속의 얼굴만 보아도 금세 알아챌 수 있다. 좌우 눈가의 가늘지 않은 주름과 양쪽 뺨에 패인 깊은 주름, 살이 접혀있는 목줄기가 그것이다.
노화를 부정적으로 보는 편에서 보면 잉스터의 접힌 살과 주름은 아름다움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동안(童顔)으로 보일지, 주름을 제거 할지에 관심을 쏟는 중년여성들의 경우, 잉스터와 동갑의 57세라면 40대 초로 보일만큼 성형하고 가꿀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쩌면 잉스터도 골프장 필드에서 강한 햇빛과 비바람 맞지 않고 더위와 추위를 피했더라면 동년배 여성들보다 그렇게 주름이 깊이 파이지 않았을 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잉스터의 얼굴과 목에 있는 주름은 오히려 골프인생에 대한 훈장처럼 빛나 보인다.

잉스터의 훈장 같은 얼굴과 목의 주름을 보며 매월 100만 명 이상이 열독하는 여성 잡지 「얼루어(Allure)」의 최근 선언이 떠오른다. 「얼루어」지의 편집장 미셀 리는 “늙는다는 것을 마치 바이러스나 곰팡이처럼 퇴치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안티 에이징(anti-aging)’이라는 표현을 더 이상 잡지에서 쓰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항노화(抗老化)라는 의미의 ‘안티 에이징‘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세태에 울리는 신선한 경종(警鐘)이 아닐 수 없다.
미셀 리의 선언은 트위터를 통해 전 세계에 리트윗되면서 8월 내내 소셜미디어의 화제가 되었다. 리 편집장은 이 편지에서 “아름다움은 젊은 사람만의 전유물이 아니다”며 “‘나이에 비해 예뻐 보인다’ 는 식이 아니라 그냥 ‘멋지다’라는 표현으로도 충분하다”고 썼다. 또 “오랜 시간 ‘안티 에이징’을 강조해온 미용업계의 마케팅 관행이 하룻밤에 바뀌진 않겠지만, ‘모든 연령대가 아름답다’는 인식을 일상 대화에서부터 정착시켜야 한다”고 적었다. 일본 아사히신문은 “리 편집장의 선언은 전 세계 패션·미용업계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했다.
나이와 관계없이 모든 연령대가 아름답다는 편집장의 방침을 반영해 「얼루어」지는 9월호 표지에 “72세의 영국 여배우 헬렌 미렌(2007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표지모델로 등장시킨다”고 발표했다. 은발의 미렌은 주름진 손을 내보이며 미소 짓고 있다. 「얼루어」지는 “미렌은 늙는다는 것과 아름답다는 것이 서로 충돌하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했다.
「얼루어」지의 새 편집방침과 관련해 유의해야할 점은 많은 여성들의 ‘노화방지 노력’이 폄훼당할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항노화 노력 자체는 대다수 그런 가치관을 갖는 사람들의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다만 노화를 퇴치해야할 부정적 대상으로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쯤에서 떠오르는 얼굴이 1993년 63세의 비교적 이른 나이에 타계한 영화배우 오드리 햅번이다. 젊었을 때 요정같은 모습을 가졌던 햅번은 아프리카 등지에서 영화 촬영을 하게 되면 에어컨은 물론 비데까지 공수해 가서 사용할 정도로 까다로운 성격을 가졌었다. 그러나 1987년 마카오 자선음악회에 참석하며 인생관이 바뀌어 유니세프 친선대사가 된 후에는 건강에 해가 될 정도로 몰입했다. 타계 1년 전인 1992년 소말리아, 케냐 등을 누비며 자선활동가로 활동할 때의 모습은 부쩍 늙고 야윈 모습이었다. 잉스터처럼 깊이 파이지는 않았으나 얼굴과 목에 가득찬 잔주름과 목주름은 통상적 이미지의 60대 초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여 세계적 여배우가 맞나 싶었다.
그러나 헵번이 안고 있는 아프리카 어린이가 배경이 되어 헵번의 얼굴은 늙은 얼굴이 아니라 아름다운 얼굴로 보인다.

‘안티 에이징’은 무용계에서도 예외가 아닐 것 같다. 어느 사회나 신진대사는 불가피 하지만 노련한 무용인의 기교와 아이디어, 안무는 그 자체가 아름다움이다. 대중예술은 유행을 타지만 클래식의 영역에서 작품은 영원하다. 무용가는 세월의 흐름과 함께 노화될 수밖에 없지만 창조를 위해 노력하는 원로 예술인들을 보노라면 삶과 예술 자체가 아름다워 보인다. 무용계의 안티 에이징은 얼굴이나 피부가 아니라 작품으로 발현됐으면 한다.
우리사회에서도 안티 에이징 상품과 의술광고는 널려있다. 이런 광고가 늙음을 부정적으로 보고 퇴치해야할 대상으로 여기거나 그런 사회풍조를 부추기는 기제(機制)로 작용해서는 안 된다. 한 잡지의 ‘안티 에이징’ 단어 추방결정이 우리사회에서도 긍정적으로 작용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