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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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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아델라이데
- 국립무용단 『춘상』·조용민 『기억들의 콜라주』·뭎 『데카당스 시스템』·장현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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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계관과 면죄부
* 국립무용단 『춘상』(9월21~24일 국립극장 대극장)
마광수가 죽고 여러 곳(언론계)에서 일종의 고해성사 같은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내용은 - 그렇게 내돌릴 사람은 아니었다. 윤동주박사 1호였다. 그의 책을 읽어 보지도 않고 비판했었다. 지금 보니 그렇게 식겁할 내용도 아니다. 그의 강의는 진지했고 해박했다. 선구자적이었다 등등. 싹 입 닦고 소동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곳이 있는 걸 생각하면, 이렇게라도 추모를 한 신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하는 것이지만, 이러나저러나 다들 웃기고들 있는 거다. 정작 본인은 사회의 갖은 멸시와 따돌림, 조롱 속에서 쓸쓸히 죽었는데 이제 와서 무슨 말을? 지난날 마광수에게 돌팔매를 던질 때 앞장섰던 건 언론사들 아닌가. 언론과 출판의 자유라는 게 진정 필요하다면, 언론은 동지자적 입장에서 권력이 책을 밟을 때 같이 싸워야 마땅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너의 의견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반대하지. 그러나 누군가 너의 입에 재갈을 물린다면 난 너의 편에서 너를 위해 싸울 거야’ 이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기본태도다. 마광수의 죽음에 언론사들은 하나마나한 부고기사를 내보내며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발행한다.
문제는 현재. 지금은 이런 일이 없는가. 비슷한 일도 없을까. 나는 공연보도에서 언론계의 비슷한 태도를 본다. 볼거리가 가득한 대작 공연이 있다치자, 개막일이 다가오면 공연 소개기사가 뜬다. 일주일 전, 이주일 전, 심지어 한 달 전. 보도일자는 점점 당겨진다. 기사는 화려한 사진들과 인터뷰로 도배를 한다. 무용이나 발레 사진은 칼라판에 적합하다. 시선을 확 잡아끈다. 공연단체는 입맛에 맞는 예쁜 그림들을 제공하고 언론사는 앞다투어 아직 막도 안올라간 공연의 단물을 빨아먹는다. 이런 기사들을 보면 아직 막도 오르지 않은 공연들의 평가들이 벌써 다 끝났음을 알게 된다. 관심이 없는 독자들은 ‘이렇게 화려한 공연이 성황리에 끝났구나’라고 오해 할만한 상황!
막도 올라가지 않은 공연 기사이니 당연히 보고 쓴 건 아니다. 어떤 공연인지 단체의 설명에 의존할 수 밖에 없고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공연단체들은 이 프리뷰 기사에 집중하게 되어 예쁜 사진 찍기에 골몰하고 과대포장된 자료 만들기에 힘을 쏟게 되는데, 큰 문제는 공연이 끝난 다음이다. 만약 공연이 보잘 것 없었다면 어쩔 것인가. 주류 언론사 중 어느 곳도 리뷰기사를 싣지 못한다. 각 언론사들은 지면을 메울 화려한 그림과 에피소드를 제공하는 댓가로 이미 면죄부를 발행하였는가. 그렇다. 그들이 화려한 칼라판으로 미리 빼먹은 프리뷰 기사는 공연단에게 하사한 월계관이자 면죄부. 아무리 공연이 한심해도 바로 며칠 전 특집 기사를 올렸던 손으로 매를 들 수는 없다. 하긴 이미 신문에서 리뷰 기사가 실종된 지는 오래! 진지한 성찰과 비평없이 공연계 발전은 무망하다. 마광수의 소설 한 권 논문 하나 읽지 않고 쥐잡듯 잡은 거나, 시작도 안한 공연 가지고 별별 기사 싣는 거나 뭐가 다른가. 7월 국립현대무용단, 8월 국립오페라단, 9월 국립무용단이 공연했다. 세 공연 모두 막이 오르기 한참 전부터 여러 스타일의 화려한 프리뷰 기사가 판을 쳤다. 그러나 정작 공연이 끝난 후 리뷰는 거의 없다. 그들의 예언자적 혜안은 모두 사실이었나?
안무와 연출은 대중적인 작품을 만들겠다 했다. 그래서 대중가요를 차용하고 갖가지 대중적인 춤을 범벅하여 작품을 만들었다. 그런데 생각나는 근본적인 질문 - 국립무용단은 국립극장에서 대중적인 작품을 할 수 있는가. 답은 ‘없다’. 국립무용단은 『춘상』을 4회 공연 했다. 해오름극장의 객석수는 3층까지 포함해서 1,564석. 4회 몽땅 만석 채워도 6,256석. … 전체 인구의 0.0125%가 이 공연을 본다. 대중적인가? 게다가 객석의 많은 분들은 이미 선구안을 지닌 귀명창들! 대중성을 얘기하지 말고 국립무용단 설립취지에 나오듯이 ‘우리 전통춤을 보존하고 현대적 계승을 통한 재창조’하여 ‘우리 예술의 아름다움을 춤으로 승화’하는 것이 정답이다. 진정한 대중성은 거기에서 출발한다. 이런 거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카리스마 편집장이 패션계를 시시하게 보는 앤 해서웨이에게 잔소리를 한다. ‘너 패션계가 우습지? 프레타 포르테가 왜 중요한지 모르지? 네가 변두리마트에서 사입은 이 촌스런 스웨터에 사용된 블루칼라와 라인은 10년 전 처음 프레타 포르테에 오른 거야’ 국립무용단이 지금 실험적이고 혁신적인 모험에 도전한다면 그것이 이후에 항간에 영향을 미치는 거다, 그게 대중화. 지금 유행하는 걸 모은다고 그게 대중화일 것인가.
무대가 열리고 40여 명의 남녀 무용수가 무대로 쏟아져 들어 온다. 소리지르고 박수치며 댄스장을 연출한다. 짝을 지어 춤을 추고 남녀가 갈라서도 춤을 춘다. 계속 환호성을 치고 박수를 치며 객석의 호응까지 기대하는 듯한데, 웬 아닌 밤중에 홍두깨, 무작정 흥겨워하는 감정에 공감되지 않는다. 게다가 너무 길다, 15분이나 클럽장면이 이어진다. 이후 남녀 주인공의 만나 사랑에 빠지는데 5분. 그 이후 주인공들은 사랑하고, 공항에서 이별하고, 몇 년 후 다시 만난다. 그리고는 다시 환호성을 지르며 친구들과 파티! 연출된 클럽신 러브신 이별신 재회신은 이미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한 장면들. 뮤지컬이나 영화에서 이미 상투적으로 써먹는 친숙하고 뻔한 이미지. 춤은 스마트 폰처럼 온갖 기능을 탑재했다. 그런데 정작 춤이 주인공으로 보이지 않고 묻혀 버리는 느낌이다. 마치 뮤지컬의 한 장면인데 아직 주역 배우가 안나온 듯한, 혹은 아이돌의 뮤직비디오인데 가수가 안나오고 배경만 만들고 있는 그런 느낌! 다시 보고 싶냐면 노! 다른 이에게 권하고 싶냐면 노!
이번 공연의 무대 의상 연출을 한 분이 다했다고 들었다. 알고 보니 지난달 국립오페라단 야외 대형공연의 무대 및 연출도 맡은 분이라고. 한 달 사이에 장르도 다른 대형공연을 척척 해내다니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오도가(悟道歌)인가
* 조용민 『기억들의 콜라주』(9월1일 공간 소극장)
조용민의 춤은 장르나 테크닉적으로 분류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움직임에는 현대춤도 있고 선무도 같은 모습도 보이고 인도춤도 보인다. 그것은 그가 기억을 더듬는 과정에서 나온 것들이다. 그의 기억이란 그저 지난 추억에 잠기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기억은 현세의 과거를 너머너머 너머서 전생으로 전생으로 치닫는, 그러다가 빙빙 돌며 노래를 중얼중얼거리다가, 훌렁훌렁 옷을 벗어서는, 그 남방행려승 같은 옷을 곱게 개어놓고 막 허물벗고 한숨돌리듯이 웅크리고 누운 그런 것이었다.
그는 공연장 입구에 서서 손님을 맞이했다. 노란 소국 한줄기를 일일이 손님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국화 한줄기를 건네받으며 마주한 그의 눈빛은 맑고 깨끗해서, 흡사 폐관수련하는 무도인이나 동안거를 마치고 하산하는 스님의 그것 같았다.
공연이 시작되자 댄서는 조심스레 무대로 들어선다. 기억의 문을 열 것인지 말건지 망설이는 것일까, 오른편 입구 벽면에서 한발 디디고는 뒤돌아본다. 이제 조심스레 들어선다. 벽면을 타고 멈칫거리는데, 이미 그곳은 바랜 곳, 벗겨지고 허물어지고 가루처럼 부수어진 곳이다.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낮게 울며 그를 인도한다. 벽면을 타고 돌며 기억들을 소환한다. 축제의 기억, 사랑의 추억들도 스쳐지나간다. 이제 기억을 쫓던 자가 의문을 가진다. 자신의 얼굴과 팔을 더듬는다. 나는 누구인가. 기억은 전생의 파도를 넘는다. 생과 사가 반복되며, 마침내 ‘딱’ 깨달음의 순간이 온다. 노래를 한다. 오도가(悟道歌)인가. 헛된 질문 하나 할 수밖에 없다. 진짜 당신은 춤추다가 ‘한소식’ 들었는가? 아님 들은 소식 전하는가? 그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한다. 젊어서 유럽으로 유학간 공학도가 춤에 빠졌다 들었는데, 기구하다. 그래서 그는 인도탁발승인가, 무용가인가, 수도자인가. 순간 나도 그의 정체를 밝혀줄 한 구절이 딱 떠올랐다.
“공문(空門)의 안뜰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깥뜰에 있는 것도 아니어서, 수도도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상살이의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어서, 중도 아니고 그렇다고 속중(俗衆)도 아니어서, 그냥 걸사(乞士)라거나 돌팔이중이라고 해야 할 것들 중의 어떤 것 들은…”(박상륭, 「죽음의 한 연구」)
그가 건네준 노란 소국은 3주를 나의 창틀에 머물렀다. 작은 꽃망울이 마저 피기를 기대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못다 핀 꽃 한 송이가 안타깝다.
이해와 공감
* 뭎 『데카당스 시스템』 (9월21일~23일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무대 위에 세 명의 컨트롤러가 있다. 이들은 무대 위의 빛과 음악을 통제한다. 출연자들이 등장해서 바닥에 타일을 깐다. 넓은 사각 ‘판’ 완성. 빛은 정확히 판 위를 비춘다. 착오는 없다. 몇몇이 판 위에서 춤을 춘다. 판 밖에는 빛이 없고 춤은 허용되지 않는다. 몇몇이 판을 떠나고 몇몇이 들어온다. 나름 질서가 짜이기 시작한다. 덩치 큰 유도복 남성이 등장한다. 유도는 전복(顚覆)을 상징한다. 판 밖을 돌던 유도가 판 위로 올라와 도복끈을 댕겨 묶자, 콘트롤러는 급히 조명을 번쩍이고 비상음을 만들어 유도를 판 밖으로 몰아낸다. 판위는 오직 콘트롤러에 순응하는 자만이 올라 올 수 있다. 서서히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판은 부분부분 접히고 물건이 쌓이기 시작한다. 질서있게 또는 무질서 하게 물건들은 쌓이고 판도 접히고 가용 면적은 좁아진다. 이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공간이 된다.
이 공연은 ‘데카당스’라는 말로 작업했지만, 알았던지 몰랐던지 ‘엔트로피의 증가’를 재현한 것이다. 엔트로피는 복잡해진다는 의미도 있고 질서를 세우기 위해 무질서가 증가하는 의미도 있고, 그러다보니 가용능력이 없어지는 걸 말하기도 하는데, 이들의 무대는 그대로 엔트로피가 증가하는걸 보여준다.
그래서 문제는 뭘까. 문제는 바로 이렇게 이성적인 말로 설명이 된다는 거다. 춤은 언어가 끊어진 자리에 있다. 거긴 모호한 공간이고 상상력과 감성의 세계. 그래서 무대를 보고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머리가 분석하고 이해하려 한다는 건 작품이 호소해야 할 장소를 잘못 찾은 거다. 춤은 눈으로 들어와서 심장을 울리는 것이지 머리를 초롱초롱하게 할 필요는 없다. 그건 춤 말고도 많다! 상황은 이해했으니, 거기에 처한 인간의 감정에 주목해서 공감하게 해주면 안될까?
춤추는 아델라이데
* 장현수 『여행』 (9월26일~27일 포스트극장)
이런, 베토벤의 가곡 「아델라이데」에 한복 입고 춤추는 모습을 그려본 일이 있을까. 이 노래를 수십 번 들었지만 한복은커녕 이 노래에 춤춘다는 상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날 포스트 극장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 이날 무대는 젊은 댄서들이 뛰어 다녔고 정작 장현수는 앞자리에 앉아 있다가 깍두기처럼 슬쩍슬쩍 존재를 보일 뿐이었다. 그래서 피아노 반주가 달리기 시작했을 때 당연히 테너의 노래이고 초록색 원피스를 예쁘게 입은 여성 무용수들의 합작품이겠거니 했다. 이전 장면에서 본 여성무용수들의 기량은 돋보였고 이들의 삼인무는 볼만해서 좋은 장면이 나오리라 기대하고 있었는데, 저런! 앞자리의 장현수가 초록색 한복치마저고리 질끈 동여매고 흰 보따리 들고 무대로 걸어 나가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노래가 나오는데 이건 바리톤! 베토벤과 바리톤과 한복입은 무용수의 생각지 못한 조합! 이제 가수는 부드러운 저음으로 노래하기 시작했고 장현수도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춤추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노래에 아름다운 춤.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장현수는 앞으로 뒤로 종종걸음 쳤고 손끝은 바르르 떨렸다. 베토벤이 사랑한 아델라이데가 나타난 듯 고혹적이다. 저러니 사랑에 빠질 수밖에. 그러나 노래가 종반으로 치닫기 시작하자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이 노래는 베토벤 슈베르트 슈만 스트라우스 볼프로 이어지는 독일 가곡사에서 초기작품. 전체 구성은 단조롭고 반복적이라 곡 후반부에서는 살짝 지겨움이 생길 수도 있는 것이어서, 이 부분을 어떻게 처리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건 기우, 장현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몸을 돌려 관객을 등졌다. 뒤로 돌아서 살짝 앉아서는 제자리에서 양팔의 곡선과 어깨, 손끝만으로 춤을 추었다. 이 노래의 하이라이트이자 부담스러운 끝 부분을 곡조에 말려 뛰어 다니지 않고 뒤돌아 앉아 뒤태만으로 표현해낸 것이다. 춤이 노래를 이겼다! 이 전략은 훌륭해서 만약 바리톤의 격정이 끝까지 갈 때 같이 치달렸으면 실망할 뻔한 것이다. 이것은 본인 안무실력과 경륜, 그리고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몸. 세 박자가 맞아 떨어진 결과이다. 노래가 끝날 때 장현수는 뒤돌아선 자세로 서서는 오른편으로 몸을 돌려 관객들에게 45도 옆 모습을 보여주었다. 난 침을 꼴딱 삼키며 감탄했다.
음악선곡은 대단했다. 베토벤, 멘델스존, 바그너, 비제까지 포함된 명단은 경탄을 자아냈다. 웬만한 안무가는 고개를 저을 리스트이며 그래서 좀처럼 춤 무대에서 만날 수 없는 음악들이 가득이다. 본질적 의미의 아마추어 열정을 보여주는 선곡. 음악연출자에게 ‘여행’은 음악으로 떠나는 유럽 여행이었을까. 전체 연출도 재미있었다. 한 여인이 초록색 문으로 들어가며 여행이 시작되고, 나오며 끝나는 설정은 액자소설 같은 것이어서 관객 모두 여행에 동참했다 나오는 느낌을 갖게 했다.
댄서들은 낚시를 하기도 하고 벽에 붙어 있기도 하고 항공사 승무원이 되기도 했는데 연기가 수준급. 다들 초록색 의상으로 통일, 양말까지 초록색. 특히 세 명의 여성 무용수 - 투피스, 긴원피스, 짧은 원피스 - 의 연기와 춤은 휼륭했고, 특히 투피스(성함을 모른다)의 움직임은 눈길을 사로잡는 무엇이 있었다. 아쉬운 점도 있다. 모든 공연물이 잘빠진 사진 한 장과 포스터에 공들이는 시대에 이번 포스터는 공연의 다채로움과 재미를 표현해내지 못했고 공연제목도 좀 밋밋하다. 공연장 사정이지만 공기가 안 좋고 음향이 부실해서 나는 끝내 바리톤 가수가 누구인지 알아내지 못했다. 서너 명 목소리가 다 들리는 거다.
최근 국립무용단에서 올린 작품들보다 이 『여행』이 훨씬 재미있고 즐겁고 아름다웠다. 특히 장현수의 독무는 압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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