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살롱

1970년대 어린이날만 되면 화형식을 당하던 만화가 오늘날 주류 문화에 편입돼 어른 독자의 사랑을 받으리라고 예측한 사람은 별로 없었을 듯싶다.
만화가 중에도 큰 기대를 받지 못했는데 대박을 친 경우가 종종 있다. 또 만화라는 영역에 없던 분야가 갑자기 조명을 받아 블루오션이 되기도 한다. 만화가 김정기는 ‘라이브 드로잉 쇼’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코스모폴리턴이 됐다.
4~9미터의 하얀 전지 위에 아무런 밑그림 없이 펜 하나로 그림 그리는 모습을 담은 SK이노베이션 CF로 알려진 김정기 작가와 처음 만난 것은 약 15년 전이었다. 그가 소속된 만화가 모임 ‘달토끼’의 발레 스케치 모임을 따라갔을 때였다. 당시 한국예술종합학교 발레과 학생들을 스케치 할 때만 해도, 그는 만화가들 사이에서 ‘스케치는 김정기가 최고’라는 평을 받았지만 ‘히트작을 내지 못하는 만화가’라는 딱지도 함께 달고 있었다.
그가 새 영역의 개척자로 우뚝 서게 된 계기는 우연히 찾아왔다. 2011년 한 만화축제에 작가부스를 내고 앉아있던 김 작가는 별 생각 없이 하얀 전지에 머리에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즉석 그림으로 쏟아냈다. 온갖 스케치로 단련된 그는 몇 시간을 하릴 없이 그림만 그렸다. 그 모습을 담은 동영상이 유튜브를 통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유튜브를 보고 해외 각국이 그에게 러브콜을 보내기 시작했다. 만화 라이브드로잉쇼는 국내에 시장이 거의 없었지만 미국, 유럽 등 해외에서는 일종의 라이브 이벤트 혹은 공연으로 꽤나 주목받고 있었다. 만화가 종이나 디지털 원고에 칸을 긋고 그림을 그려 넣는 작업이라고만 규정짓는 것은 편견이다. 음악에 맞춰 칸 없는 큰 종이에 하나의 거대한 즉석 카툰을 완성하는 것도 만화다. 웬만한 데생력과 속도를 갖추지 않으면 감히 도전할 수 없는 장르다.
김 작가는 온갖 행사에 초청을 받아 6개월 이상을 해외에 체류한다. 최근 그와 연락했을 때, 그는 벨기에 만화행사에 참석 중이었다. 세계 2대 경매 중 하나인 크리스티 경매에서 그의 작품이 2년 연속으로 판매됐으며, 코믹콘 같은 해외만화 행사에서 10만 원이 넘는 화보집만 200개 이상 팔려나간다.
그의 성공을 나열하는 것은 여기서 줄이기로 하자. 대중이 라이브드로잉쇼라는 새로운 만화 분야에 환호하는 이유는 예상치도 못한 ‘빅픽처’가 즉석에서 완성되는 충격 때문이다. 큰 종이에 밑그림 하나 없이 수 시간에 걸쳐 수백, 수천 개의 대상을 오밀조밀 채워가는 작업이 끝나면, 하나의 주제가 뚜렷한 그림으로 완결된다. 매번 그릴 때마다 같은 그림은 하나도 없다. 인간의 머릿속에는 수억 개의 은하가 가득 들어 있는 것 같다. 그것을 라이브로 표현해낼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위대함이 아닐까.
그와는 가끔씩 기획을 의논하곤 한다. 최근 만남에서 그는 “소리꾼이 판소리 「춘향가」를 완창할 때 그 내용으로 라이브드로잉쇼 하면 재미있을 것 같은데. 같이 해볼래요?”라고 말했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엄지를 들어보였다. 그것을 받을 만한 선수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