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숭문화광장

불우이웃돕기를 포함해 문화 예술 체육 분야에 대한 대기업들의 기부금 지출이 크게 줄어든 것으로 집계돼 기부금에 많이 의존하는 해당 분야의 관계자들은 활동이 위축되지나 않을지 노심초사하는 모습이다. 올해 상반기 20대 대기업의 기부금은 2755억 원으로 지난해 상반기보다 12.2%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매년 불우이웃돕기 성금이 몰리는 하반기 기부금이 상반기보다 거의 2배 가까이 많긴 하지만 지난해 하반기에 비해 올해 상반기 기부금은 41.2%나 감소했다고 한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따르면 국내 사회 공헌 최대 ‘큰손’으로 꼽히는 삼성전자의 올해 상반기 기부금은 약 1160억 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9% 감소했다. 반도체 활황으로 영업이익이 늘어난 점을 감안하면 기부금 감소는 더 두드러져 보인다. 이처럼 기부금 액수가 급감하게 된 최대 원인은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의 영향이 크다. 기업들이 미르·K스포츠 재단에 낸 기부금으로 곤욕을 치르자 기부금을 전반적으로 줄인 것으로 풀이된다.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일명 김영란 법)’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법위반 여부에 대한 기준이 모호하다 보니 기부에 몸을 사릴 수밖에 없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 때문에 큰 액수의 기부금은 이사회 의결을 거치게 하거나 문제가 안 될 항목에 대해서만 기부를 하는 등 기업의 ‘자체 검열’이 강화되는 분위기이다. 이에 따른 유탄을 가장 심하게 맞는 분야가 문화 예술계이다. 소액이나마 협찬을 받기 위해 마케팅부나 사회공헌부서의 문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지만 담당자 면담조차 쉽지 않다고 한다. 중학생들에게 필수 감상곡을 들려줘 청소년기부터 고전음악의 즐거움을 알려주려던 한 교향악단의 계획은 예산부족으로 15회 공연을 절반으로 줄일 수밖에 없었다며 현장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1990년 10월 평양에서 열린 범민족통일음악회의 취재 기자로 초청받아 갔을 때 북측 안내원의 질문 중 하나가 잊히지를 않는다. 남측 음악인 14명과 기자 3명이 일행이었는데 음악인 14명에는 안내원이 1명인데 비해 기자 3명에는 2명의 안내원이 방북 내내 함께 했다. 기자 중에는 여기자가 2명이어서 안내원 1명은 시종 필자만을 안내했다.
음악회는 6일 동안 계속됐지만 전후 리허설과 관광을 위해 모두 11일간 체류하는 동안 안내원과는 이런저런 남북의 생활상에 대한 대화도 나눌 만큼 친숙하게 됐다. 안내원은 거의 매일 남쪽 신문들을 보고 있는데 연말이 되면 ‘불우이웃돕기’행사가 벌어지는 게 이해가 안 된다면서 질문을 했다. “남조선의 기업인들이 왜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내느냐?”는 물음이었다.
연말이면 불우한 이웃을 돕는 캠페인이 늘 있어 왔기 때문에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필자에게 안내원의 질문은 엉뚱한 것이어서 얼핏 좋은 대답이 생각나지 않았다.
안내원이 받은 공산당식 자본주의 이론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앞잡이인 기업인은 노동자를 착취만 하면 그만인데 불우이웃돕기에 성금을 내는 게 이해가 안 되었던 모양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편견을 넘어 무지한 안내원에게 기업의 이익은 소비자를 대상으로 상품을 판매해 얻게 되고 추운 겨울을 힘겹게 나야 하는 이웃들이 있으므로 이익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본주의 기업인들이 정말 그런 마음을 갖고 있느냐고 되물으며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안내원은 심지어 남한의 기업들은 문화·예술 활동에도 많은 기부를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의심과 놀라는 표정을 짓기기까지 했다. 특히 공연 티켓 수입이 있어도 부족한 제작비 마련을 위해 기업에 협찬을 요청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해 자체가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런 공연을 수고스럽게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투로…. 모든 예술행위를 국가가 지원하고 국가가 필요한 예술 활동만 할 수 있는 북한 시스템에서 안내원의 질문이나 놀라움은 당연한 것이어서 남한의 공연 제작 시스템이 어떻게 다른지 소개해줬다.
그중 하나는 정부예산의 뒷받침을 받고 있는 국·공립 예술기관도 많지만 더 많은 수의 민간 예술 단체가 있어 개인의 아이디어에 따른 예술 활동이 활발하다고 말했다. 이를 통해 다양한 예술 활동이 이뤄질 수 있기 때문에 정부의 기금지원도 받지만 너무 적고 늘 부족해 기업으로부터의 후원이 불가피함을 설명해줬다.

문예부흥기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명문가(名門家)를 꼽으라고 하면 교과서에 있는 대로 누구나 메디치가(家)를 꼽는다. 피렌체 동북부 무젤로 지방 출신의 메디치는 상업으로 성공하며 은행가로 거금을 모은 금융업자이자 피렌체 공화국과 토스카나의 정치적 지배자였다. 그러나 메디치가가 역사에 명문가로 기록되는 이유는 그 재력 때문이 아니라 르네상스문화 보호자로서의 명성 때문이었다. 기업이 문화와 예술을 보호하고 지원하는 메세나(Mecenat)운동은 고대 로마제국의 정치인으로 문예보호운동에 혁혁한 자취를 남긴 마에케나스(Maecenas)에 그 어원이 있지만 미켈란젤로를 지원한 메디치가에서 절정에 오르고 꽃핀다. 그리고 그 전통은 오늘도 선진국 기업들의 문화지원으로 이어지고 있다.
21세기는 인터넷을 통한 소통으로 경제도 문화도 하루가 다르게 국제적으로 경쟁해야 하는 전쟁 같은 상황이다. 한류와 경제는 피상적으로 보면 관련 없는 듯이 보이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된다.
사회전체의 문화역량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상품자체에서 문화적 색깔을 찾고 있는 세계시장에서 기업은 물론 국가이미지도 살아남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 한류의 원류는 순수예술임을 새삼 깨달을 필요가 있다. 한류의 기본 구성은 음악과 춤으로 클래식이나 국악 없는 한류음악이 가능할 수 없고 발레나 현대 무용의 기초 없는 한류 춤이 하늘에서 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언젠가 다시 평양을 방문해 27년 전 안내원을 다시 만나게 되면 그 안내원은 “어떻게 남한의 한류가 북한 주민도 숨어서 볼만큼 매력적이고 전 세계에서 유행될 수 있느냐?”고 물어 올 것 같다. 그러면 기업이 불우이웃돕기에 성금을 내듯, 문화 예술에도 스폰서로 참여해 메디치가처럼 후원을 많이 해준 결과라고 대답해주고 싶다. 몇 달 안 남은 올해 하반기 기부금이 오히려 늘어나 한 오케스트라의 중학생 클래식 입문 공연이 원래대로 열리고 필수 감상곡을 들은 더 많은 청소년들이 클래식을 즐기는 성인으로 성장하기를 기원한다. 대학로에서도 기업 후원을 신청했다가 성사가 안 돼 공연을 못하고 좌절하는 무용인이 없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