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향시향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말은 보릿고개에서 나왔지요. 두산백과를 찾으니 보릿고개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난가을에 수확한 양식은 바닥이 나고 보리는 미처 여물지 않은 5~6월(음력 4~5월), 농가생활에 식량사정이 매우 어려운 고비.”
1960년대까지 보릿고개를 겪었다는데, 보릿고개가 되면 사람들은 먹을 게 없어서 초근목피로 연명했다고 하지요. 그 초근목피(草根木皮)가 변비를 일으키는데, 심한 경우 항문이 찢어져서 피가 날 정도였다지요. 한 끼 건너기가 강물 건너는 것보다 힘들었다는 보릿고개.
물론 지금은 사라진 고개입니다만, 우리 부모세대는 누구나 힘겹게 넘어야 했던 고개이지요. 그 시절이 어떤 시절인지 모르겠다고요. 그 시절에는 쌀 두 가마에 사람을 팔고 사기도 하던 시절입니다. 당장 우리 부모가 그렇게 살아오셨더랬지요.

어머니는 참 무식하시다
초등학교도 다 채우지 못했으니 한글 쓰는 일조차 어눌하시다 아들이 시 쓴답시고 어쩌다 시를 보여드리면 당최 이게 몬 말인지 모르겠네 하신다 당연하다

어머니는 참 억척이시다
열일곱 살, 쌀 두 가마에 민며느리로 팔려 와서, 말이 며느리지 종살이 3년 하고서야 겨우 종년 신세는 면하셨지만, 시집도 가난하기는 매한가지요, 시어미 청상과부라 시집살이는 또 얼마나 매웠을까, 그래저래 직업군인인 남편 따라 서울 와서 남의 집살이 시다살이 파출부살이 수십 년 이골 붙여 자식 셋 대학 보내고 시집 장가 보냈으니, 환갑 넘어서도 저리 억척이시다 이번에 내 시집 나왔구만 하니, 이눔아 시가 밥인겨 돈인겨 니 처자식 제대로 먹여 살리고는 있는겨 하신다 당연하다

무식하고 억척스런 어머니가 내 모국이다 그 무식한 말들, 억척스런 말들이 내 시의 모국어다 당연하다

지금까지 써 온 수백 편 시들을 전부 모아 밤새 체를 쳤다 바람 같은 말들, 모래 같은 말들, 다 빠져나가고 오롯이 어, 머, 니,만 남았다
- 박제영, 「어머니는 참 무식하시다」 전문

꽃 얘기도 아니고 보릿고개니 민며느리니 무슨 뚱딴지 같은 얘기냐고요? 실은 감꽃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 자연스레 보릿고개가 나왔네요. 보릿고개 그 한가운데 피는 꽃이 감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엄마 어릴 때 보릿고개 오월은 하 길고 길어서 엄마는 그 노란 꽃을 떫디떫은 감꽃을 밥 대신 따먹었다지요. 아이는 아이라 그 와중에도 감꽃을 굴비처럼 실에 꿰어 목걸이로 만들어 목에 걸고 다니다가 배고프면 하나씩 빼 먹기도 했다지요. 감꽃과 함께 그 길고 긴 보릿고개를 넘었다지요.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겠지요. 청마 유치환과 나눈 애틋한 연애편지로 유명한 이영도(1916~1976) 시조시인의 「보릿고개」를 소개한다 해도 요즘 젊은 사람들은 뭔 소린지 통 모르겠다 하겠지요.

사흘 안 끓여도
솥이 하마 녹슬었나

보리누름 철은
해도 어이 이리 긴고

감꽃만
줍던 아이가
몰래 솥을 열어보네 - 이영도, 「보릿고개」 전문

아이라고 눈치가 없겠습니까. 굴뚝에 연기 끊긴 지 이미 오래 된 것을 아이도 알고 있었지요. 끓일 양식 떨어진 지 오래된 것을 아이도 알고 있었지요. 찔레순으로 허기를 달래 보고, 아카시꽃으로 허기를 달래 보고, 감꽃으로 허기를 달래 보지만, 그런 것으로 채워질 허기가 아니었겠지요. 그러니 알면서도 헛된 기대인 줄 알면서도 빈 솥 열어보는 것이지요.
혓바닥이 노랗게 되도록 감꽃 주워 먹고 밤새 배앓이하고, 그래도 날이 새면 다시 감꽃 주워 먹고 배앓이하고, 감꽃 먹고 배앓이하기를 수십 번 하다 보면 겨우 넘을 수 있었던 보릿고개. 배를 곯다가 배를 앓다가 살아남은 자들만 겨우 넘었다는 가난 고개, 눈물 고개. 이영도 시인만, 이영도 시인의 고향만 그랬겠습니까. 마을마다 굶어죽는 사람이 지천에 널렸던 시절. 우리 부모세대의 고향은 어디라고 할 것 없이 다 그런 모습을 하고 있더랬지요.

그런데 감꽃 하면 제가 제일 먼저 떠올리는 시는 따로 있습니다. 김준태 시인의 「감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감꽃이 보릿고개의 메타포로 쓰인 것과는 사뭇 다른 작품이지요. 김준태 시인의 첫 시집, 「참깨를 털면서」(창비, 1977)에 실린 짧은 시인데, 먼저 감상부터 하시지요.

어릴 적엔 떨어지는 감꽃을 셌지
전쟁통엔 죽은 병사들의 머리를 세고
지금은 엄지에 침 발라 돈을 세지
그런데 먼 훗날엔 무엇을 셀까 몰라
- 김준태, 「감꽃」 전문

김준태 시인의 감꽃은 ‘보릿고개’라기보다는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상징하지요. 감꽃(별처럼 생긴 꽃이니 어쩌면 별일지도 모르겠네요)을 세던 어린 아이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는 죽은 병사의 머리를 세고, 근대화 산업화로 포장되었지만 실제로는 박정희에서 전두환에 이르는 군부독재 시절에는 돈을 세면서 성장하여 마침내 어른이 되고 가장이 되었지요. 열심히 살았는데, 현실에 순응하면서 열심히 잘 살았는데, 시인은 어째 잘못 살았다고 고백하는 것 같지 않나요?
고등학교, 대학교 때 읽었던 이 시를 한동안 잊고 살다가 다시 떠올린 건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모 대기업에 입사했던 때였습니다. 서울역 앞에 있던 그 대기업 건물 1층에는 은행이 있었고, 저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직원들은 그 은행을 이용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은행에 이상한 풍경이 생겼습니다. 유난히 긴 줄, 특히 남자들로 꽉 찬 긴 줄이 생긴 겁니다. 알고 보니 어떤 여자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지요. 지금 생각해도 그 여자는 무척 예뻤지요. 그런데 제가 그때나 지금이나 그 여자를 기억하는 건 실은 그 여자의 이름 ‘나말자’라는 얼굴과 참 어울리지 않는 그 이름표 때문입니다. 아무튼 감꽃처럼 예쁜, 고향에 두고 온 누이를 닮은, 그 여자를 보면서 어느 날 문득 김준태 시인의 「감꽃」이 떠오르더군요. 그리고 그때 「감꽃」을 모방해서 쓴 졸시가 바로 「말자氏」입니다.

언제나 말자氏는 그 자리에 앉아 있다 오전
아홉시에서, 오후
다섯시까지
열아홉에서, 스물아홉까지
(그 사이에 변한 거라곤 주판 대신 피시가 놓인 것뿐)
미세하게 늙어가면서 일원짜리
동전에서 일억짜리
당좌수표까지 수없이
돈을 세면서 언제나 미소진 얼굴로
말자氏는 그 자리에 앉아 있다 오늘도

십년 후의 말자氏를
은행 창구의 말자氏를
생각한다 서른아홉에 돈을 세고 있을
말자氏의 낡은 미소를
조금 더 미세하게 돈을 세고 있을
말자氏를
- 박제영, 「말자氏」 전문

어느 날 제법 안면을 트고 친해져서 자판기 커피를 뽑아주기도 했던, 나보다 밥을 삼백 그릇은 더 먹었으니 누나라고 부르라 했던 말자 씨는, 감꽃처럼 예뻤던 말자 씨는,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세고 있을까요? 아직도 돈을 세고 있을지, 아니면 돈 대신 이제 감꽃 같은 별을 하나둘 세고 있을지 문득 궁금해지는 세월입니다.
어릴 때 할머니가 그러셨지요.
“보릿고개가 무척 질었네라(길었단다). 감꽃 피고 오일장 세 번 지내고, 풀국새 울고 오일장 세 번 지내믄 지우(겨우) 보릿고개를 넘었네라.”
보릿고개, 피고개 넘는 것으로 일생을 살다 가신 할머니. 그 간난신고의 시절을 모르고 살았지만, 지난 오십 년 동안에도 감꽃 피고 지고 피고 져도 그 감꽃에 담긴 아픔 모르고 살았지만, 나이 오십이면 지천명(知天命)이라 했던가요. 요즘은 모르고 지나온 것들, 모르고 살아온 사연들이 문득 문득 궁금해지기도 하는 세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