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산책

2008년, 한국갤럽은 ‘지난 20년간 사라진 것’에 관한 조사를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1).
늘 운전하며 지나던 길을 멈춰 문득 주위를 보니 새 건물을 짓고 있었다. 이 길, 수년을 거쳐 대학로를 가거나 춤지 사무실을 가기 위해서 어김없이 거치는 길이었지만 희한하게도 이 자리에 무슨 건물이 있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안 나는 것이었다. 이번 일이 처음은 아니다. 늘 살던 곳이라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허투루 본 것투성이에 실제로 잘 기억하거나 아는 것도 없는 나의 착각이었을 뿐이었다. 어디 건물뿐이랴, 문득 뒤돌아보니 나보다 더 오래 사실 것 같은 아버지도, 잘 안다고 생각했던 지인의 마음도, 언제나 평화로울 것 같은 논과 밭도 어느 샌가 사라지거나 변질되어가고 있다. 어떤 것들은 도심에서는 살기 힘들어 숨어버린 것들도 있고, 문명의 이기에 사라진 것도 있으며, 수요자로부터 외면되어 아예 새로운 기능으로 변종된 것도 있다. 위의 설문조사에서 어떤 이들은 ‘사람 간의 정(情), ‘옛 정취 및 환경’, ‘예의’, ‘학창시절 풍경’, ‘배려’, ‘넉넉한 인심’ 등을 주위에서 사라진 것들로 꼽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본질이 변하거나 사라졌다하기 보다는 생활환경의 변화에 따라 그 모습이 변한 것이지 결코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면 오늘의 새로움도 내일부터는 지나간 것이 되어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조사 자료는 잠시 향수에 젖게 만들지만 너무 많이 사라진 목록들을 보며 보존하지 못하고 사라진 뒤 아쉬워하는 미련함을 느껴지게도 하다.
반대로,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조사 자료는 상대적으로 찾기가 매우 어려웠다. 글을 쓰다 잠시 생각해봐도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딱히 생각나는 것은 문화재, 명절같이 일상생활에는 많이 와 닿지 않는 것들이다. 하늘 아래 영원한 것은 없어서일까, 불가능하다고 여겨서일까. 그나마 변치 않는 것은 우주와 자연계의 원리와 법칙 그리고 인간의 본능 정도가 다라면 될 것 같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세상이 빨리 변한다고 빠른 세월을 한탄하고 옛것을 그리워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바뀌지 않는 본질을 망각한 채 변해야 할 껍질을 보고 변하고 사라졌다고 아쉬워하는 것은 아닌지 나의 생각을 점검해본다. 단적으로, 텔레비전도 흑백에서 컬러로 바뀌었을 뿐, TV 자체는 아직도 있는 것이고, 삐삐와 전화기도 형태가 바뀌었을 뿐, 인간이 소통을 하고 싶어 하는 욕구는 바뀌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러한 욕구가 더 나은 기능으로 발전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스마트 폰도 사라질 날이 있을 것이며 위의 목록 중 하나로 자리를 차지할 날이 있을 것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인간이 TV를 보며 즐기고, 소통을 하며, 혼자라도 흥얼거리며 노래하고 싶어하는 모든 인간의 행위를 ‘유희‘에서 찾을 수 있겠다. 놀이는 경제적 관점으로만 본다면 비합리적이고, 비생산적인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아직도 고루한 어른들 중에는 자녀가 예술가가 되겠다면 “이거하면 돈이 나오니, 밥이 나오니!”라고 다그치실 정도니까. 인간의 유희는 유아기에는 뛰어놀기나 흉내 내기, 낙서 등으로 표출이 되다가 성숙해지면서 예술로 승화된다. 이렇듯 인간이 유희적이라면 예술적 본능은 누구에게나 있다. 또한 사람 사이의 정, 옛 정취 및 환경, 예의, 학창시절 풍경, 배려, 넉넉한 인심 등이 사라지기는 커녕 오히려 변치 않고 지속 가능한 이유가 아름다움과 선함을 추구하려는, 인간에서 찾을 수 있는 품성 중 하나 때문임을 반증한다. 이러한 본능이 있기에 인간은 동물과 다른 것이다.

하루가 멀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하루에 한 달, 월간 「춤」 을 받는다. A4용지 반절 크기로 춤 사진 대신 늘 미술작품이 표지를 장식한다. 이번 달은 무슨 그림일지 갈색 재생지 봉투를 서서히 꺼내는 동안 소심하게 두근두근 기대를 갖게 된다. 한 달 동안 무슨 할 말이 많았는지 하얀 건 종이요, 검은 건 글로 그득히 채워진 책을 펼쳐 내용들을 훑어나간다. 고화질 디지털 동영상시대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초기의 그 모습 그대로를 한결같이 그대로 이어가는 그 기개는 어디서 난 것일까.

“장난이지 뭐.”

쑥스러운 듯 웃으시던 발행인 故 조동화 선생님의 말씀에서 그 해답을 찾는다. 인간의 유희 본능으로 시작하여 이토록 큰 정신으로 열매 맺은 선생님의 장난에 많은 분들이 참여하셨고, 「춤」을 통해 문화 예술계에 큰 영향을 끼쳐왔다. 나도 2005년부터 「춤」지와 인연을 맺기 시작하여 선생님의 ‘장난’에 동참할 수 있어서 영광이라 생각한다. 대부분 수험생처럼 남들 놀 때 책상에 몇 시간이고 앉아 원고와 싸우고 원고마감일이 다가올수록 스트레스를 받아가면서, 때론 원고파일을 잘못 보내 완성본이 아닌 글이 실려 마음고생하면서도 기꺼이 할 수 있는 원동력은 선생님의 ‘장난‘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의 발로로, 나 역시 유희적 인간이어서 일 것이다. 더러는 이 작은 흑백의 책을 읽고 있는 모습에 아직도 이런 책이 나오냐며 놀라워하기도 한다. 「춤」지를 만드는 사무실도 「춤」지의 산실답게 신식 고층 건물사이로 단출하고 좁은 2층짜리 옛 모습을 대부분 간직하고 있다. 언제 가도 반겨주시던 조동화 선생님은 이제 이 세상에 안계시지만, 한결같은 모습을 지켜내고 있는 사무실은 짧은 시간이나마 나에게 큰 추억을 안겨준 고향 같은 곳이다. 이 작은 공간에서 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이야기를 만들어 갈 것이다.

학교에서도, 언론매체에서도 늘 변화를 강조한다. 그리고 누구도 빠짐없이 변화에 동참하도록 권유를 하지만 지키고 보존하자는 목소리는 찾기 힘들다. 그래놓고는 오늘날에는 옛 정취가 남은 것이 없다고 한탄하며, 변화를 부추길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사라져가는 것을 탓한다. 잃고 나서 복원한들 그 모습 그대로 돌아올 수 없으며, 잃고 난 후에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변화는 필요하다. 하지만 변치 않고 한결같은 모습과 전통을 지키고 있는 이들을 존경할만한 가치가 있다. 개인의 취향이나 고집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본질과 초심을 지키려는 이의 표현이기 때문이고, 이를 공감할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몇 세기를 거쳐 보존되고 있는 전통문화 역시 과거에는 새로운 트렌드였을 것이고 그러다가 낡아버린 구식이었을 시절이 있었다. 오늘도 내일의 어제. 결국 변화에 충실히 따라가는 삶보다는 오늘에 충실 한 삶이 과거에도 충실했을 것이며, 미래에도 역시 충실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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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갤럽 홈페이지 ‘지난 20년간 사라진 것’에 관한 조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