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2018년 1월의 마지막 날, 황병기 선생께서 영면하셨다. 가야금음악의 작곡가이자 연주가로서 많은 활동을 하신 분이다. 한국의 창작음악과 관련해서 큰 역할을 하셨음은 물론, 지식과 지혜가 풍부한 분으로서 한국문화계에 미친 영향은 크다.
이제 월간 ‘춤’지를 통해서, 황병기 선생(1936년 5월31일~2018년 1월31일)의 삶과 예술에 대해 수회에 걸쳐서 얘기하려한다. 이렇게 ‘춤’지에 글을 쓰는 것이, 필자에게는 매우 영광스러워 가슴 뿌듯하면서도, 또한 매우 아릿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조동화 선생(1922년 7월12일~2014년 4월24일)이 함께 떠오르기에 그렇다. 생전 두 분은 서로를 존중하는 분이셨는데. 이제 모두 이곳에는 계시지 않는다.
여기에 또한 박용구 선생(1914년~2016년 4월6일)이 겹쳐진다. 모두 한국의 문화계의 전방위에서 큰 역할을 하셨다. 저마다의 분야가 분명했지만, 예술과 문화에 대해 있어서 매우 열려있는 ‘르네상스적 지식인’이셨다.
조동화 선생이 2014년에 떠나고, 박용구 선생이 2016년에 떠나고, 이제 황병기 선생이 2018년에 우리 곁에서 떠났다. 참으로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분들이다. 공연예술이 뿌리를 내리기가 그리 쉽지 않았던 시대를 살았음에도 모두 세상과 사회에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늘 ‘낭만적 긍정성’으로 사셨던 분들이다. 공명심이나 사명감을 내세우지 않았고, 그저 자신과 관련된 분야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사신 분들이다. 그런 것들이 당대에는 물론이요 후대에까지 계속 꾸준하게 이어지고 있다. 향기는 멀어질수록, 더욱 맑아진다고 했던가! 향원익청(香遠益淸)은 진정 이분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세 분을 떠오르면, 자연스럽게 황병기의 작품 「미궁」부터 생각난다. 1975년에 명동국립극장(현, 명동예술극장)에서 초연된 작품이다. 황병기의 ‘가야금’과 무용가 홍신자의 ‘목소리’가 함께 했다. 당시로는 이 작품이 매우 센세이션한 작품이었다. 그리고 대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작품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 작품을 그저 대중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매우 난해하고 실험적인 작품’으로 치부하고, 요즘말로 옮긴다면 「미궁」의 공연에 대해서 ‘자극적인 이벤트성 퍼포먼스’ 정도로 매도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치부되지 않았던 배경에는 조동화와 박용구의 남다른 시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황병기와 홍신자가 만난 「미궁」이전에, 두 사람의 협업이 이미 있었다. 우리는 그 작품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 ‘전통’과 ‘창작’이 만났을 때, 얼마만큼 신선하면서도 깊이가 있을 수 있는지를 제시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미궁」처럼, 황병기가 무대에 등장하지는 않는다. 대신 황병기가 기획하고, 연출한 공연이었다. 「홍신자 전위무용 발표회」(1973년 9월 23일)로 명동국립극장(현,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되었다. 「미궁」 이전에도 홍신자라는 무용수는 이미 ‘목소리’를 동원해서 관객과 소통하고 있었다.
황병기와 홍신자가 만들어낸 이런 공연에 대해서, 춤평론가 조동화는 당시 매우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한국에서 활동할 수 있는 매우 커다란 힘이 되어주었다고 생각한다. 홍신자의 공연을 대다수의 관객이나 선입견의 평자들이 그저, ‘실험적이고, 난해한 공연’으로 몰아갔지만, 조동화의 시각은 남달랐다. 그는 당시(1970년대)의 우리가 잊고 있던 무용시(舞踊詩, choreopoem)와 연결해낸다. 조동화는 이들의 작품을 “형식이 기괴하게 여겨지더라도 그것은 30년대에 새로웠던 무용시와 이어지는 전통을 딛고선 오늘의 무용”이라고 평가한다. 여기서 ‘1930년대’라는 시대적 연결과, 이것이 또한 ‘전통’을 기반으로 한 작품이라고 포착하는 시선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에 이런 것(전통)을 바탕으로 해서 ‘오늘’의 작품이 탄생된다는 탁견(卓見)이다.
「홍신자 전위무용 발표회」에선 작곡가 백병동의 창작곡도 무용음악으로 사용되었지만, 결과적으로 가장 관심은 끈 것은 역시 ‘제례’였다. 공연기획자 황병기의 주선으로 국립국악원 악사들이 섭외해서 무대에서 직접 ‘제례악’을 연주한 것이다. 이런 무용음악과 함게 펼쳐진 홍신자의 무용작품의 제목은 『제례(祭禮)』였다. 홍신자는 여기서 제례를 시작하면서, ‘목소리’로 참여한다. 홍신자는 이 작품에서 ‘부군(夫君)을 일찍 잃은 청상(靑孀)’이 되어서 슬픔과 관능을 넘나든다. 이 작품은 홍신자가 먼저 떠난 자신의 친언니를 그리워하면서 만든 작품이기도 하다. 원래 뉴욕에서 초연되었으나, 한국에 와서 제대로 ‘제례악’을 배경으로 해서 작품적인 완성도를 높인 작품이다.
『제례』는 이런 정서를 호곡(號哭), 개복(改服), 헌주(獻酒), 소지(燒地)와 같은 제례 절차로 그려내는데, 이 작품을 보고 당시 한 기자는, 호곡(號哭)과 연관해서 이렇게 평하고 있다. “그녀가 몸짓뿐만 아니라 목소리까지도 표현매체로 동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쳐 깨달을 겨를도 없이 관객을 압도한다.” (1973년 9월29일, 동아일보 장윤환 기자)
황병기가 기획, 연출하고, 홍신자가 안무 출연한 작품에 대해선, 두 사람의 평론가는 매우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조동화는 “홍신자는 큰 배다. 이제 그 배가 우리에게 왔다”라고 하면서, 이런 작업에 대해서 힘을 실어주었다. 또한 박용구는 “1904년 이후 처음 보는 감동적인 무대”라고 호평했다.
이런 황병기와 홍신자의 작품을 보면서, 조동화의 ‘전통’에 관한 일설(一說)은 지금도 내 마음을 두근두근하게 만든다. “전통은 지키려는 곳에서는 빠져나가고, 항상 새롭게 하는 곳으로 스며드는 익살꾼”이라고 조동화는 얘기한다. 전통에 관한 많은 정의가 있지만, 이만큼 내게 경종을 올린 정의도 드물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전통’을 외치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분들의 예술에서 ‘전통’을 발견되기 보다는 ‘답습’과 ‘박제’를 보게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스스로 전통이라고 얘기하지만, 거기엔 모험이 배제된 ‘모방’만이 있을 뿐이다.
황병기가 세상을 떠났다. 황병기는 평소 ‘전통’을 외친 사람이 아니다. 자신이 ‘가야금’을 하는 것에 사명감이나 명분을 부여하지 않았다. 황병기가 홍신자를 한국에 불러들이고, 함께 이런 공연을 펼친 것은, 예술적인 마케팅을 계산한 기획공연도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그 당시의 자신들이 ‘하고 싶은 것’을 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매우 경직되고, 사제관계가 너무도 엄격했던 당시 우리 예술계에 새로운 숨통을 트게 한 계기가 되었다.
나는 이런 황병기의 음악세계에 대해서 1985년 이렇게 평가한 바 있다. “황병기는 한국 현대음악사에 있어서 이정표적 존재이다. 그의 작곡세계는 마치 나선형과 같은 두 가지 인력이 작용한다. 하나는 중심으로 향하는 힘(전통)이고, 다른 하나는 이에서 벗어나려는 힘(미래)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