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평

관객 없는 공연은 없다. 관객 없이는 공연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당연해 보인다. 관객은 항상 극장 안에서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줄곧 함께 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관객은 ‘보는 사람’, 즉 수동적인 참여자로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한 관객의 위치가 점점 더 능동적 입장으로 진화해왔지만, 이른바 ‘공동작업자’로서의 기능이 강하게 주장된 것은 우리 춤무대에서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특히 많은 퍼포먼스가 관객을 적극적인 퍼포머로 작업에 끌어들이고자 한다. 극장 공연에서 관객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어떤 형태가 옳은가? 물음들에 아직 정답은 없다. 대부분 그것은 불완전한 형태로, 아직 실험중임을 표방한다. 즉, 관객이 공동작업자여야 한다는 주장은 있지만, 그 모습에 대해서는 각자 공연의 과제가 되어 현재진행 중이다. 그러므로 만약 작가 주도의 작품이 아닌, 관객의 존재에 물음을 던지는 춤공연을 제작하는 안무가라면 좀 더 깊이있는 접근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 이동원 안무 『가상리스트』(1월12~14일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이동원 안무작 『가상리스트(virtual list)』는 “아름다운 가상과 결핍된 현실은 욕망의 환유다”라는 명제에서 출발한다. 이 작품은 가상, 실재, 욕망, 환유, 죽음, 주체 등과 같은 철학적이고 추상적인 개념들로 설명하여 처음부터 난해한 무언가를 예고한다. ‘가상 목록’이라는 제목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듯, 이 작품은 가상에 관한 내용임을 암시한다.
공연은 ‘비지정석’임을 공지하고 출입문을 한 곳으로 제한하여 오픈 전부터 관객들을 줄세운다. 무대가 일종의 가상공간을 연출하고 있지 않을까 예상하며 입장한 관객은 자유롭게, 즉 자신이 보고자 하는 방향에서 스스로 자리를 선택할 수 있다(물론 늦게 입장한 관객은 그냥 빈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지만). 극장 안은 사방이 뚫려 있는 듯한 구조다. 정확히 말하면, 객석이 3면에 배치되고 한 면은 바닥과 천장에 이어지는 설치여서 무대의 확장된 개방감을 연출한다. 바닥에서 천장으로 이어지는 3면은 영상이 채운다. 무대를 점령하는 영상의 과도한 사용이 일상에서 흔히 쓰는 가상공간 같은 의미의 ‘버추얼’을 먼저 의식하게 한다. 하지만 영상들은 가상과 실재(현실)의 대립이라는 일상적인 내용과 연결되기보다는, 오히려 무대장치의 일부로서 작품의 공간화를 연출하는 배경으로 기능한다.
60분 길이의 공연에는 10명의 남녀무용수가 출연하고, 대체적으로 안무는 집단성에 포커스를 둠으로써 이야기의 전개보다는 장면의 이미지화를 연출한다. 거기에는 욕망-가상-현실을 연결시키는 요소들이 다양하게 존재한다. 풍부한 영상이 주는 공간연출과 이미지, 텍스트 낭독의 청각적 자극, 식욕을 상징하는 구체적인 소품사용, 와이어를 이용한 공중 공간의 활용, 질주하는 무용수들의 움직임이 표상화하는 감정들, 무질서한 동선으로 연출되는 정체성 없는 군상 등…. 하지만 그러한 장면들은 추상적인 개념들을 구현하는 데 한계가 있다. 그리하여 ‘인간의 욕망으로 만들어진 가상은 현실을 이미지화 한다’는 작품의 주제에 대한 막연한 아이디어는 공연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되지 못한다. 비록 가상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명확하지 않지만, 안무자의 주제의식은 욕망과 가상에 대한 성찰을 불러일으킨다. 현실적인 불행, 즉 충족되지 못한 삶에서 비롯된 욕구불만이 가상적인 것들을 현실화시키려는 욕망으로 강하게 표출되는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공연에서 테크놀로지와 가상의 연결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과제다. 오랜 과거로부터 본래 극장의 무대는 그 자체로 가상이었다. 일상적인 삶, 즉 현실과 다른 세계가 펼쳐지는 시공간이었다. 그때는 누구나 쉽게 허구와 사실을 분리할 수 있었다. 예술이 어떻게 현실을 가상화하는지에 대한 연구들이 오랫동안 이어져 왔고, 현대에는 테크놀로지 미디어의 발전에 의해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새로운 기술들과 그에 기반을 둔 미디어는 가상과 현실의 구분을 어렵게 한다. 그것은 가상과 현실이 분리되지 않음을 목적으로 하며 현실의 가상화, 가상의 현실화를 통해 가상의 관념 자체를 의문시한다.
이 점과 관련해서, 춤예술은 극장 혹은 무대라는 공간과 테크놀로지 미디어의 연결을 가장 빠르게 수용하고 그것의 활용에 적극적인 매체가 되었다. 모험적인 실험들을 통해 그러한 개념들이 어떻게 발전될 수 있을지가 관건인데, 현재 무용은 기술보다 소극적인 편이다. 실험들의 궁극적인 목적이 새로운 발상이나 각성에 있다면, 춤무대는 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기존의 관념에 머물러 있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테크놀로지 활용에 관심있는 안무가들의 분발을 기대한다.

* 김성훈 안무 『노 필름』(1월12~14일 CKL스테이지)
김성훈의 안무작 『노 필름(No Film)』(2015년 초연)은 전체 ‘입석’, 즉 스탠딩(standing) 공연이어서, 관객이 약 50분 동안 서서 관람하는 형식이다. 물론 일찌감치 의자나 방석 없이 그냥 바닥에 앉거나 공연 중간에 자리를 잡고 앉는 관객도 있었다. 스탠딩 공연은 본래 관객에게 불편함을 주기 위함이 아니다. 객석을 고정하지 않은 것은 관객의 자유로운 관람뿐만 아니라 나아가 관객의 능동적인 참여를 유도하기도 한다. 관객은 단순히 서서 보는 것이 아니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매번 다른 방향에서 무대를 보고 시각을 넓혀 체험을 달리 한다. 이 같은 형식은 특히 작품의 성격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노 필름』은 그러한 성격을 의도하지만, 공연 내내 움직이는 관객은 없고 움직임은 전적으로 출연자들의 몫이었다. 출연자들은 관객들 사이에 파고들거나 무대 주위를 빙 둘러 다니면서 사방 어디에서든 가운데로 들어오게 되어 있다. 관객들은 가만히 있거나 오히려 옆에서 몰래 스며든 무용수들에게 놀라 쳐다봄으로써 시선을 집중시킨다. 그래서 막상 무용수들이 갑자기 무대 가운데로 뛰어들 때는 무덤덤하다. 관객들이 무용수들과 함께 움직여줄 때 이 작품의 의미가 좀 더 부각될 수 있었을 텐데, 결국 우연성을 강조한 연출의 의도는 상당히 반감되는 것이다.
형식적인 면에서, 또 하나의 특성은 무대를 완전히 개방한 점이다. 사방이 열린 무대공간은 시선을 분산시키고 몰입을 방해하는 요인으로서, 『노 필름』은 그러한 효과를 이용한다. 무대는 정확히 사방이 트여 있다. 그렇게 객석과 구획되지 않은 구조이지만, 흰색 무대바닥으로 인해 사실상 나뉘어져 있다.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관객은 아무 곳이나 자유롭게 이동이 가능하지만 절대 그 공간을 침범하지 않는다. 또한 노출된 천장에는 자루들이 매달려 있고, 공간을 둘러보던 관객은 그것이 언젠가 무대로 떨어지는 장치임을 쉽게 파악하게 된다. 그래서 막상 ‘쿵’ 하고 더미들이 한꺼번에 무대에 떨어질 때 별로 놀라지 않은 것도 연출의 효과를 반감시킨다.
‘독재자에 대한 다각적 시선’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 작품에서, 안무자는 독재자의 상징으로 히틀러를 소환한다. 나치당의 전당대회에서 이루어진 히틀러의 유명한 연설이 스피커를 통해 무대에 퍼지고, 무대 위에는 검은색 가면을 쓴 것처럼 분장해 얼굴을 가린 독재자가 지팡이를 휘두른다. 그는 숨어 있는 사람들을 잡아들이고 폭력과 학살을 감행한다. 남녀무용수 11명이 출연하는 작품에서, 함께 움직이는 집단의 군무는 강한 세력, 굴복을 요구하는 ‘힘’을 인상적으로 묘사한다. 군복을 입은 나치당원들과 히틀러를 연상시키는 독재자에 대한 연출은 다소 상징적이다. 안무자의 문제의식은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이 아니라 현시대의 독재적 상황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안무자는 독재자적 통치기술로 개인을 억압하는 사회를 풍자하는 블랙코미디를 내세웠지만, 결과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다. 히틀러가 압축하는 독재자, 독재사회에 대한 안무자의 해석을 바탕으로 한 주제가 불분명하다. 문뜩 ‘노 필름’이라는 제목의 의미가 궁금해진다. 역사적 사건을 뛰어넘어 독재의 문제를 다루고자 했다면, 현재 우리의 일상적 삶에 다양한 형태로 펼쳐지고 있는 독재의 실체를 발견하여 소재화가 필요하지 않았나 싶다. 지금은 단순히 거대한 권력만이 문제가 아니라 소소한 삶에서 마주하는 작은 독재자들이 넘쳐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공연의 형식은 독재의 느낌, 즉 공포감을 강화시키는 측면이 있어 작품의 의미를 어느 정도 확인시켜준다. 어두운 그림자 같은 검은색 복장의 무용수들, 날카로움과 아찔함을 극대화한 여성무용수들의 하이힐, 피로 물든 자루들 등 몇 가지 장치뿐만 아니라 무대와 객석을 넘나드는 무용수들의 소리없는 움직임이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독재자가 객석 너머 깊숙이 응시하며 무대를 빙 둘러 천천히 움직일 때, 그 순간이 만들어내는 공포감이 유일하게 작품의 주제와 연결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