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스크랩북

문을 열자 새파란 하늘과 햇살과 흙내음이 벌써 봄이 와 있음을 알린다. 쌓인 낙엽 속에서 겨울을 이겨낸 춘란(春蘭)의 푸르름이 유난히 돋보인다. 그동안 이 난(蘭)들은 방 속에서 한 번도 꽃펴본 일이 없어 얼어 죽은들 어떠하랴 싶어 밖에 내쫓아 옮겨 심었었는데 다음해 봄부터 꽃피기 시작한 것이 이제는 정원 한 구석을 자리 잡은 주인으로 행세하게 된 지도 몇 년 되었으니 서울 북쪽 수유리 자연에서도 춘란은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봄도 역시 춘란 꽃무더기마다 꽃망울이 부풀어 얼마 있지 않으면 꽃이 펴날 것이 확실하다.
겨우내 말라 있던 물확(石池)에도 흥건히 빗물이 고였다. 이틀 새 온 봄비가 이 정도면 그동안의 가뭄도 가셨을 것 같다. 이제 진흙 속에 숨었던 마름의 씨도 눈을 트겠지. 이 세상에서 마름 씨처럼 자기 몸을 철저히 무장하는 놈은 드믈 것이다. 세모꼴의 유난히 큰 씨, 그 모난 부분마다에 나 있는 날카롭고 긴 가시, 나는 늦가을 물확 속에서 죽은 수초(水草) 마름을 건져낼 때마다 마름 씨 가시에 손가락을 찔리곤 하였다. 그러나 가시가 없었던들 풀씨를 찾아 논바닥을 뒤지는 물새들에게서 감히 마름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겠는가, 하는 애교 쪽으로 용서할 수밖에 없었다. 양지밭 여기저기에 히야신스 수선(水仙)의 싹들이 벌써 놀랍게 성장하였고 그 사이사이에는 멀리서 날아와 뿌리내린 씀바귀, 민들레 꽃다지 같은 봄풀들이 갈색의 겨울옷을 아직 벗지 못한 채 자리 잡고 있다.
홍매(紅梅)는 금년에도 꽃이 필 것 같지 않다. 7,8년 전 옮겨심으면서 잘못 다룬 후유증을 이렇게 오래도록 앓고 있는 것일까 안쓰런 생각이 든다. 사실 홍매처럼 서울 기후에 잘 맞는 꽃나무도 없는데 유난히 이놈은 노여움을 타지 않는 것 같다.
지난겨울, 이웃집에서 화재가 났을 때 그쪽 담곁에 있던 감나무가 타버렸다. 가을마다 여기서 많은 감을 땄었고 그늘 역시 좋았는데 이제는 흉한 몰골로 거기 서 있는 것을 보니 가슴이 아프다. 앞으로 싹이 돋아나는 가지를 지켜보면서 베어버리든지 살려두든지를 결정지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불낸 주인은 아직까지 한 마디 미안하다는 말이 없다. 그렇다고 불난 집에 대고 내가 뭐하고 말할 수도 없고…. 어떻든 감나무까지도 불에 타죽는 허망한 세상이라는 것을 탓할 수밖에 없다. 양살구나무가 전선 높이를 넘고 담 넘어 길가로 뻗어 작년 가을 그 가지치기에 애를 먹었으나 결국 전선에 걸린 가지는 치지 못하고 말았다. 나무가 높아서 무서워 오를 수 없었던 것이다.
나도 이제는 이렇게 겁쟁이 늙은이가 돼버린 모양이다, 그러나 바람이 불면 필경 가지는 전선을 건드릴 것이기 때문에 자르지 않을 수 없고…. 봄은 공연히 마음이 초조하다.
나는 정원에서 가시가 달리 장미꽃이나 신당화나무 그리고 찌르는 잎새의 향나무는 모두 치워버렸다. 손자들이 공 주으러 갔다가 찔릴 것 같아서 였다. 대신 대나무, 진달래, 후박, 산수유, 백일홍, 참나무 같은 것만을 골라 심었다. 그런데 도토리, 참나무는 그 잎새에 독충이 잘 꾄다는 사실을 새로 알게 되어 보기 좋게 자란 그 참나무들을 모두 잘라버렸다. 굳이 잘라버릴 것까지 없이 눈여겨보며 독충을 잡아주면 될 것을…, 하는 후회도 하였으나 손자에 관한 한 나는 늘 이렇게 성급한 버릇이 있는 모양이다.
20여 년 전 인사동 골동가게에서 우연히 얻은 석지(石池)가 좁은 나의 정원에서 아이들의 물놀이와 모래놀이터로 큰 몫을 하고 있다.
그때 골동가게 주인의 말은 이 석지는 하동 쌍계사 주방에 있던 것에 벽을 뚫어 여기에 물을 받아 밥그릇도 씻고 하던 돌그릇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어디서 무엇에 썼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아름답고 크고 흠이 없는 돌확이라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어 얻은 것뿐.
어떻든 그 후 나는 쌍계사로 놀러갔었는데 그때 일부러 나의 석지가 앉아 있었다는 그 절의 주방을 둘러보았다. 그랬더니 과연 나의 석지가 앉아 있었음직한 빈자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너무도 놀라웠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이것이 거기의 것일까. 그것을 모른다. 만일 주방의 그릇이었다면 대체 무슨 이유로 이 큰 석지가 험한 쌍계사 산길을 내려와서 서울로 옮겨졌을까 하는 것. 다만 석지의 석질(石質)이 쌍계사 주변 돌과 같고, 그 마모도(磨耗度)나 만들어진 솜씨, 그리고 상처하나 없이 너무도 깨끗이 보존돼 있는 사실이 이 물건이 1천여 년 동안 어떤 건물 속에 있었다는 것을 확신할 따름.
어떻든 나는 신라의 정경한 물그릇을 얻어 정원에 옮겨놓고 여름이면 여기에 물을 담아 손자들에게 멱을 감게 하고 가을이면 또 가을대로 물대신 깨끗한 한강 모래를 담아 손자들이 많지 않는 손을 파묻고 놀 수 있다는 것에 나는 어떤 축복과 길상(吉祥)의 연(緣)이 있는 것 같아 기쁘다. 허나 이 모래에는 동리의 도둑고양이들이 와서 오줌똥을 싸서 파묻는 바람에 이것을 관리한다는 것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도시 속에서 이렇게 작은 정원 하나 지킨다는 것부터가 짐스럽다. 내가 아직 근력이 있었던 몇 년 전까지만 하여도 해동(解冬)에 기울어진 돌을 바로세우는 일을 혼자서 했고, 반톤 정도의 큰 돌은 기중기로 이리저리 옮기기도 하였는데 요즘은 아들의 손을 빌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나는 아직 정원 일에서 손 뗀 것은 아니다. 이제 날이 풀리면 나는 기중기를 가지고 종일 일할 생각을 하고 있다. 이놈은 힘이 장사여서 힘센 아들 두셋 데리고 하는 것보다 편하며 우선 눈치 볼 필요 없다는 것이 좋다.
사실 아들에게는 생활이 따로 있고 해야 할 일의 순서가 있으니까 아버지의 일에 손을 빌린다는 것은 힘들 것이다. 더구나 나에게는 이 모든 돌 하나하나에 사연이 있고 애정이 있지만 아들에게는 우선 그것이 없을 테고, 내가 좋았던 것이라고 해서 그것을 아들에게 권할 생각은 없다. 물론 제가 좋아서 스스로 따라온다면야 그처럼 흡족한 일은 없을 테지만.
어떻든 내 정원의 돌 모두는 옛날 각각 다른 사람의 소유물이었던 것처럼, 마침내는 이것들도 언젠가는 뿔뿔이 흩어져 다른 사람의 손으로 옮겨질 것이 분명하다. 비에 젖은 돌들이 청결한 정원 속에서 봄 향기를 뿜는다. 비에 젖은 정원은 아름답다. 얼마 전까지도 비는 하늘의 뜻이었다. 그러나 TV가 구름 기상 사진을 비치면서 그 엄격한 ‘하늘’은 그만 어디론가 없어져버렸다. 그래서 그런지 봄비의 신비는 옛날 같지 않고 그저 덤덤하지만 하다.

「동서문학」 1995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