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스크랩북

나는 어려서부터 말더듬이였다. 그것이 보통학교, 중학교로 올라가면서 점점 더 심해져 선생님이 나에게만은 읽히는 것을 면제해줄 정도였다. 그러나 그 특권은 나에게 다행스러움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가져다주는 고통이기도 하였다.
중학교 2학년 때 김진수(金鎭壽)라는 분이 일어 선생님으로 새로 부임하셨는데, 이 선생님은 나의 그런 특권을 모르시고 어느 날 읽기를 지명하시는 것이었다. 물론 이런 경우, 곁의 친구들이 으레 “말더듬입니다”라고 큰소리로 싸인을 하여 난을 피하게는 되었지만, 수업이 끝나자 선생님은 나를 가리키며 “나 좀 보자”고 하셨다. 새삼 부끄러움과 적개심이 이는 마음으로 선생님 뒤를 따라 교무실 쪽으로 걸었다. 그런데 선생님이 뒤돌아보시면서 “너의 작문이 훌륭했어. 책 많이 읽니?” 하는 너무도 의외의 말을 꺼내셨다. 나는 뭐라고 대꾸도 못했다. 선생님께서 이미 나를 알고 계신 것이 황송하고… 그러니까 처음 느껴보는 부끄러움 같은 것 때문이었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김 선생님은 일본 릿쿄(立敎)대학 문과를 마치시고 1936년 극예술연구회의 희곡 ‘길’ 당선으로 활약하시던 극자가셨다. 키가 작고 들창코에 머리는 항상 부스스하고 매무새가 꾀죄죄하셨던 총각선생님. 그러나 학생들의 심리를 꿰뚫어보시는 능력이 있으셨다.
직원실로 들어가자 선생님은 처음부터 그렇게 준비나 하셨듯이 책 한 권을 주시면서 “소리 내어 천천히 읽으면서 모두 암기해와” 하셨다. 일본말로 번역한 「바이런 시집」이었다. 어떻든 너무 고마웠고 감격스러워 아무 말 못하고 책을 받았다. 사실 나의 실력을 처음 알아주신 분이라는 것에 대한 가슴 뭉클함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나는 방과 후면 매일매일 학교 담 뒤 공동묘지가 있는 언덕에 가서 소리 내어 시를 암송하곤 하였다.
“오! 장엄한 아테네여, 너의 위엄은 지금 어디에…” 하는 것에서부터.
나의 그 언덕은 산나리꽃, 도라지꽃은 있으나 쓸쓸한 곳이었다. 나는 거기에 누워서 암송하였다. 푸른 하늘과 흐르는 흰 구름, 싸늘한 바람, 그런 것이 후기중학생인 나의 운명과 말더듬까지 겹친 좌절로 한없이 한없이 슬펐던 일을 기억한다. 그러나 시를 암송해야 하는 강제적인 그런 시간과 공간을 체험하지 못했고 그럼 감상을 가져보지 못했던들 나는 그 좌절 속에 그대로 주저앉아 살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긴 시가 줄줄 암송되면서부터 말이 더듬어지는 첫 발음 ㅇ, ㄷ, ㅂ 부분을 미리 알게 되어 그것을 조심할 여유를 가지게 되니까 마침내 말더듬이도 서서히 고쳐지게 되었다.
선생님은 다른 학생이 있는 데선 아무 말 않으시지만 계단 같은 데서 나 혼자만을 만나면 “계속하고 있겠지? 열심히 해라!”고 하셨다.
선생님은 서울에서 57세를 일기로 별세하실 때까지 K대학에 계셨는데 술을 즐기셨다. 술에 취하시면 이제는 성장한 나에게 “너 말더듬이었지” 하시면서 의미 있게 손가락질 하시곤 하셨다. 나는 그 말씀이 그리도 다정하고 고맙게 들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 선생님께 하나도 보답을 해드리지 못하고 말았다. 죄송하게 생각한다.

「생활과 원자력」, 1996년 3월(통권 3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