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향시향

「동의보감」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爲鶯鳥所含且形似桃故曰櫻桃” 간략히 번역을 하면 ‘앵조(鶯鳥, 꾀꼬리)가 즐겨 먹고, 그 모양새가 도(桃, 복숭아)를 닮았다 하여 앵도(櫻桃)라고 불렸다’는 뜻입니다. 지금은 벚나무 앵(櫻)을 쓰지만 본디 꾀꼬리 앵(鶯)자를 썼다는 얘기입니다.
실제로 앵두는 꾀꼬리를 비롯한 많은 새들이 좋아하는 열매 중 하나라고 합니다. 단순호치(丹脣皓齒)와 앵순(櫻脣)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요?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미인의 조건으로 붉은 입술(丹脣)과 하얀 이(晧齒)를 들었는데요, 붉은 입술 중에서도 최고의 입술을 붉은 앵두 같은 입술이라 하여, 앵순(櫻脣)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믿어도 되나요 당신의 마음을/ 흘러가는 구름은 아니겠지요/ 믿어도 되나요 당신의 눈동자/ 구름 속의 태양은 아니겠지요/ 사랑한단 그 말 너무 정다워/ 영원히 잊지를 못해/ 철없이 믿어버린 당신의 그 입술/ 떨어지는 앵두는 아니겠지요
― 안치행 작사·작곡, 최헌 노래, 「앵두」(1978) 전문

앵두 같은 입술, 앵순(櫻脣). 잘 익은 앵두만큼이나 붉고 반짝이는 입술. 곰곰 생각하면 앵순은 실제 앵두를 닮은 입술이라기보다는 지금 내가 사랑하는 여자의 입술이겠다 싶습니다. 사랑에 빠지면 눈에 콩깍지가 씌면 그 입술이 앵순으로 보이지 않겠나 싶습니다.

「조선왕조실록」 문종실록에 보면, 앵두 관련해서 이런 얘기가 또 나옵니다. 효심이 뛰어난 문종이 세자 시절 앵두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입니다. “문종은 경복궁 후원에 손수 앵두나무를 심어 직접 물을 주면서 정성껏 길렀다. 그리고 앵두가 익는 철을 기다려 세종께 올렸다. 세종은 이를 맛보고 ‘외간(外間)에서 올린 것이 어찌 세자가 손수 심은 것과 같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앵두를 즐겁게 먹었다.” 실제로 조선의 왕궁에 가보면 곳곳에 앵두나무가 자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왕궁 나들이 할 일이 있다면 꼭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요즘은 통 앵두나무가 보이질 않지요. 한때 전국의 어느 마을을 가도 볼 수 있었던 흔하디흔한 나무였는데 말입니다. 마을마다 우물이 있고, 우물가에는 꼭 앵두나무가 있었는데 말입니다.
하얀 꽃이 환하게 피었다 지면 붉은 앵두가 우수수 열리고… 우물가에서 수다 떨던 누이들, 집으로 돌아갈 때 한 바가지씩 앵두를 담아가곤 했던 그 모습을 이제는 볼 수가 없지요.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 처녀 바람났네
물동이 호밋자루 나도 몰라 내던지고
말만 들은 서울로 누굴 찾아서
이쁜이도 금순이도 단봇짐을 쌌다네

석유등잔 사랑방에 동네 총각 맥 풀렸네
올가을 풍년가에 장가 들라 하였건만
신붓감이 서울로 도망갔다니
복돌이도 삼룡이도 단봇짐을 쌌다네

서울이란 요술쟁이 찾아갈 곳 못 되더라
새빨간 그 입술에 웃음 파는 에레나야
헛고생을 말고서 고향에 가자
달래주는 복돌이에 이쁜이는 울었네
― 천봉 작사, 한복남 작곡, 김정애 노래, 「앵두나무 처녀」(도미도 레코드, 1955) 전문

마을회관 앞 앵두나무 다 익으면
떠났던 사람들 돌아올 것입니다
잎보다 먼저 오판화(五瓣花)가 피듯이
앵두는 한 순간에 다 익는 법 없습니다
설익은 것들이 푸른 잎사귀 위로 쫑긋할 때
농익어 주름진 것들은 황토 물들이며 사라집니다
앵두가 익을 무렵 앵두는 지고
지는 열매를 주우러 모여든 할머니들은
기웃한 삽짝 같은 기억을 앵두칠합니다
붉게 물든 혓바닥이 만든 광채에 이끌려
골목을 뛰어다니는 핵과(核果) 같은 아이들도
앵두를 얻어먹으러 이 골목에 멈춥니다
여기가 아니라면 누가 앵두의 시절을 믿을까요
앵두가 익을 무렵, 없는 나무에 손 뻗어
앵두를 흘리는 어린 소녀들을 보았습니다
초저녁 그믐 달빛 젖어 앵두장수 떠나가고
시간을 잃어버린 할머니들은 오랜만에
주인 없는 앵두 앞에서 홍조를 띱니다
연서(戀書) 같은 꽃 기별 듣거들랑 누이처럼 오구려
앵두는 익어도 오지 않는 사람들 있어
벌레 먹은 꽃받침처럼 황혼에 역력합니다
― 김종태, 「앵두가 익을 무렵」 전문

김정애의 노래 「앵두나무 처녀」를 틀어놓고, 김종태의 시 「앵두가 익을 무렵」을 읽습니다. 가능하면 이글을 읽는 당신도 따라해보시기 바랍니다.
새마을운동과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된 1960년대. 농촌을 떠나 너나할 것 없이 서울로 서울로 떠났지요. 이쁜이도 금순이도 단봇짐을 싸서 서울로 가고, 복돌이도 삼룡이도 단봇짐을 싸서 서울로 갔더랬지요. 이쁜이는 새빨간 입술에 웃음을 파는 에레나가 되고, 금순이는 공순이가 되어 미싱을 돌리고 또 돌렸더랬지요. 그 사이 마을에는 우물도 사라지고, 앵두나무도 사라졌지요. 어쩌다 간신히 마을회관 앞에 앵두나무 한 그루 심어져 있기도 하지만, 어쩌다 간신히 마을에 남은 누이들은 이제 할머니가 되어 앵두나무 아래에서 떠났던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지만, 기웃한 삽짝 같은 기억을 앵두칠한들, 누가 앵두의 시절을 믿을까요. 앵두는 익어도 사람들은 이제 돌아오지 않을 테지요.

그녀가 스쿠터를 타고 왔네
빨간 화이바를 쓰고 왔네

그녀의 스쿠터 소리는 부릉부릉 조르는 것 같고, 투정을 부리는 것 같고
흙먼지를 일구는 저 길을 , 하고 가로질러 왔네
가랑이를 오므리고
발판에 단화를 신은 두 발을 가지런히 올려놓고
허리를 곧추세우고,
기린의 귀처럼 붙어 있는 백미러로
지나는 풍경을 멀리 훔쳐보며
간간, 부레끼를 밟으며

그녀가 풀 많은 내 마당에 스쿠터를 타고 왔네
둥글고 빨간 화이바를 쓰고 왔네
- 고영민, 「앵두」 전문

고영민 시인의 시 「앵두」와 김정애의 노래 「앵두나무 처녀」 사이에는 사실 객관적으로는 어떤 관련도 없지만 왠지 깊은 관련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 을 십 년 전에 했더랬습니다. 십 년 전, 고영민의 「앵두」라는 시를 처음 봤을 때 기억이 아직도 또렷합니다. 이 시를 보자마자 저는 김정애의 「앵두나무 처녀」를 떠올렸더랬거든요. 1960년대 단봇짐 싸서 서울 갔던 이쁜이가, 새빨간 입술에 웃음을 팔던 이쁜이가,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던 이쁜이가, 40여 년 만에 다시 고향에 돌아왔구나! 스쿠터를 타고 빨간 화이바를 타고, 티켓 파는 다방의 ‘지나’가 되어 고향에 돌아왔구나. 그런 생각을 했더랬거든요. 우물 대신 티켓 다방이 들어서고, 앵두 같은 레지들이 누이를 대체하면서 세상은 돌고 돈다는 그런 우울한 생각을 했더랬거든요.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는지요?

그때 내 품에는
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
바람이 풀밭을 스치면
풀밭의 그 수런댐으로 나는
이 세계 바깥까지
얼마나 길게 투명한 개울을
만들 수 있었던가
물 위에 뜨던 그 많은 빛들,
좇아서
긴 시간을 견디어 여기까지 내려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그때는 내 품에 또한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이
옹색하게 살았던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래 그 옆에서 숨죽일 무렵
― 장석남, 「옛 노트에서」 전문

앵두,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시가 아무래도 장석남의 「옛 노트에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세상은 점점 더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내 몸, 내 정신, 내 마음이 그 변화의 속도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둘 사라져갑니다.
우물이 사라지고 앵두나무가 사라지고 누이들이 사라지고 내 안에 무수한 그리운 것들이 사라지고 그리울 것들이 사라져 갈 것입니다. 슬퍼할 일은 아닙니다. 그게 삶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