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숭문화광장

지난 달 마지막 금요일(26일)저녁 서초문화예술회관의 700석 좌석은 400여 명의 어린이 관객과 이들 ‘꼬마 손님’을 동반해 온 부모 관객들로 넘쳐났다. 좌우 통로에는 보조의자를 임시로 배치하고 보조의자 좌석도 모자라 늦게 온 손님들은 5월 어린이날 공연에 우선 초대하기로 약속하고 돌려보냈다. 아침기온이 영하 17도였고 공연시간 전후에는 영하 12도의 맹추위가 계속되고 있는데도 유치원생과 초등학생들이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온 공연은 발레동화 『피터와 늑대』였다.
프로코피에프의 음악에 와이즈발레단이 출연한 이날 공연에 앞서 문예회관 측은 날씨 때문에 걱정이 많았다. 새해맞이 특별공연으로 서양클래식, 국악, 대중음악 순으로 매주 금요일 프로그램을 구성했는데 무용 순서가 어린이 대상인데다 올 겨울 최고 한파가 예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화책으로 만났던 『피터와 늑대』를 발레로 볼 수 있다는 어린이들의 행복한 기대는 이를 이겨 누르고도 남았다. 어린이 관객들은 KBS성우 송연희 씨의 실감나는 해설에 일일이 응답했고 피터의 기지로 늑대가 잡힐 때 큰 박수로 호응했다. 이날 공연은 어린이 관객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메인 프로그램이 『피터와 늑대』였지만 문예회관 측이 더 신경을 쓴 프로그램은 1부에서 보여준 갈라 공연이었다. 『피터와 늑대』는 동화발레여서 관객들이 스토리 위주로 관람을 하다보면 발레 자체의 아름다움은 놓칠 수 있어 마련한 기획이었다.
이를 위해 『피터와 늑대』는 2부 순서로 미뤄놓고 1부에서는 체자레 푸니의 『라 비방디에르(술집주인)』 중 6인무, 차이코프스키 『백조의 호수』 중 파드되, 아당의 『해적』 중 그랑 파드되를 30여분 보여줬다. 이들 세 순서에 대해 부모는 물론 ‘꼬마 관객’들은 출연 무용수의 기교 넘치는 발레 동작에 감탄하며 환호하고 박수를 보냈다. 공연이 끝난 후 주차장으로 가면서 어머니와 두 아이가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피터와 늑대』 재미있었어?”라고 어머니가 묻자 아이는 대답했다. “응, 너무 재미있었어. 나도 발레 배우고 싶어.”
인터넷에는 이날 공연에 대한 후기도 블로그에 올라와 있었다. ‘가족과 함께 보는 동화 발레 『피터와 늑대』’라는 제목으로 올린 글에서 블로거 배OO는 1부 갈라 공연에 대해 “편안한 클래식 음악을 배경으로 중력을 거스르며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발레는 언제 봐도 아름답다!!! … 팔꿈치 관절과 손끝 등 전신의 근육 하나하나를 각각 움직이는 듯했던 오데트 역의 김찬미님, 인간의 팔꿈치가 저런 각도로 꺾어질 수 있는 건가 경이로움을 느끼며 진짜 백조가 파닥거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후기를 적었다. 블로그 끝에서 배OO는 “-11°~-18°C 사이의 날씨, 체감 온도 영하 25도라는데, 그럼에도 맘에 드는 공연을 보고 훈훈한 마음으로 귀가했다”고 적었다. 이 블로거는 같은 후기에서 전세계약을 서둘러 마친 후 관람을 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를 보면 전문가도 아닌 평범한 관객인 듯하다. 그래도 후기에서 보듯이 감상평은 예리하고 혹한의 날씨에도 발레로 인해 훈훈한 마음으로 귀가했다면서 저녁 시간을 행복해 했다.
한 블로거의 행복해 하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며칠 전 본 영화 「위대한 쇼맨」의 마지막 장면에 화면 가득히 나온 명언 “가장 고귀한 예술은 다른 이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다(The noblest art is that of making others happy.)”가 떠올랐다.
지난 연말 개봉돼 이미 100여 만 명이 본 「위대한 쇼맨」은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서커스의 제왕’이라고 불리는 흥행의 귀재 P. T. 바넘(1810~1891)의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이다. 양복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난 바넘이 상류층 고객의 딸을 좋아하다 뺨을 맞지만 여자 부모의 반대에도 끈질긴 사랑 끝에 결혼하고 타고난 재능으로 서커스단을 만들어 성공한다는 줄거리이다. 서커스단의 공연에 대해 엉터리들을 모아 놓은 사기공연이라는 신문의 혹평이 싫어 당시 유럽 최고의 소프라노 제니 린드(1820~1887)의 미국 순회공연도 성공시키지만 결국 서커스단으로 돌아오는 바넘의 모습에서 “가장 고귀한 예술은 다른 이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라는 아포리즘의 중요성이 인식된다.
바넘은 대중 상대의 서커스단 공연 흥행주라는 평가절하가 싫어 19세기 중반 ‘스웨덴의 나이팅게일’로 불린 소프라노 제니 린드의 미국 순회공연을 성공시킴으로써 자신이 단순한 대중공연 흥행사가 아님을 입증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바넘은 결국 서커스든, 소프라노 공연이든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게 예술이라는 평소의 소신을 다시 깨닫게 된다. 바넘의 소신에서 보듯이 관객을 행복하게 해줄 수만 있다면 불법이 아닌 한 고급예술이나 저급예술이 따로 있을 수 없다.
아직도 우리나라 현실에서 발레는 일부 소수 층이 즐기는 이른바 고급 예술장르로 분류된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의 「문화향수 조사」에서는 2퍼센트 안팎의 응답자만이 무용공연을 1년에 한 번이라도 봤다고 대답하고 있는 게 우리의 실정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모든 무용인들이 발 벗고 나서 무용관객의 저변확대에 나서야 한다. 굳이 대학로 아르코 무대만 최고로 여길 필요도 없고, 예술의전당 무대에 서야 체면이 선다고 고집할 필요는 더구나 없다. 실험무대나 창작무대, 처음 제작하는 작품이라면 전문가와 애호가들을 위해 특정 공연장이 필요하겠지만 이미 평가받은 공연이라면 적자가 나지 않는 선에서 지방이든 작은 공연장이든 기회 닿는 대로 찾아야 한다. 그 같은 공연장은 여건도 안 좋고 출연료도 작지만 그래도 현재의 무용인들이 희생하며 찾아 나서야 미래 한국에서 무용 예술은 희망한대로 꽃을 피울 수 있다.
현재의 무용인들이 미래의 한국 무용계를 위해 ‘희생’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바넘의 아포리즘 “가장 고귀한 예술은 다른 이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다”를 떠올리면 추운 날 적은 출연료로 공연한 와이즈발레단의 노고는 “공연을 보고 훈훈한 마음으로 귀가했다”는 한 블로거의 후기로 충분히 보상 받았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한 어린이 관객은 재미는 물론 “나도 발레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이런 관객들이 모이고 쌓여야 우리 무용계는 미래가 밝아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