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향시향

오늘은 산수유 얘기를 하려고 했는데, 산수유를 생각하니 자꾸만 덕구 형이 떠올라서 그냥 덕구 형 얘기나 좀 할까 합니다. 대학 선배 덕구 형은 남들 다 부러워하는 K대 법대를 나온 나름 유능한 변호사였는데, 어느 날 서울 사무실을 접고 고향 구례로 내려갔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아내와 딸이 교통사고로 죽고 폐인이 되다시피 했다는 간단한 설명과 함께 말입니다. 그리고 덕구 형을 잊고 지냈는데 어느 날 형에게 편지가 왔습니다.

구례 촌놈이 서울놈들 변호를 하고 있으니
이만 하면 출세한 건데
가슴팍은 왜 맨날 지랄맞은지 모르겠다
꽃이나 심어야지
산수유 핀 고향으로 돌아가야지
술만 걸치면 그놈의 꽃을 입에 달고 살던 덕구형

그해 유월이었나
아내와 딸을 꺾어버린 뺑소니범을 찾겠다며
덕구형이 사무실을 닫고 훌쩍 자취를 감췄던 게

오년 만에 편지가 왔다
봉투 속엔 달랑 사진 한 장뿐이다
─ 유월에 구례 한번 내려와라 작약 보러 와라
색시도 새로 구하고 덤으로 예쁜 딸도 하나 얻었다
작약 밭에서 덕구형이 웃고 있다
작약 같은 몽고 여자와 산수유 같은 이국의 소녀가
함박 함박 웃고 있다 ― 박제영, 「작약」 전문

편지에는 사진도 함께 들어 있었는데, 구례로 내려간 형은 애 딸린 몽고 여자와 새살림을 차린 모양인데, 형의 표정은 아픔을 다 잊은 듯했습니다. 다시 행복을 찾은 듯했습니다. 갑자기 형이 보고 싶어진 나는 부랴부랴 구례로 향했습니다. 법복을 벗고 농부 옷으로 갈아입은 형의 모습을 보면서, 형이 이제야 자기 옷을 입었다 싶었습니다. 처음부터 농사꾼이었던 것처럼 형은 지리산자락과 하나였습니다. 실제로 만난 몽골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는 형수는 사진보다 훨씬 미인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어떻게 처음 만났는지 궁금했습니다.

뺑소니로 아내와 딸을 잃은 덕구 형은 그해 겨울 산에 들어가 겨우내 항아리를 구웠다

울화가 맺혀 살이 든 것이니 불로 태워버려야 한다 항아리 백 개에 매화 백 송이가 필 때쯤이면 풀릴 거다

스님의 처방대로 항아리 백 개를 구웠지만 한 계절 또 한 계절이 지났지만 매화는 끝내 피지 않았다

― 그때 마 정말로 죽을라했다 죽을라꼬 약을 묵었는디 이 여자가 날 살려부렀다
― 몽골에서 이역만리 여그까지 시집왔는디 남편이란 작자가 뱃속에 아만 뿌려노코 먼저 가버렸으니 이녘 팔자도 나맹키로 거시기혀다
― 죽을 놈 살려놨으니 어쩔 거냐고 책임지라고 안했나… 근디 실은 이녘 꽃그림에 반해서 살림을 차린기다… 이녘이 이래봬도 그쩍 대학서 동양화를 전공했어야
― 봐라 이게 이녘이 그린 매화랑께

덕구 형, 매화문 달 항아리를 꺼내 보여주는데

― 그기 아니고… 비슷한 처지라꼬 한 절에서 곁불 쬐다 그저 연분이 난 거지라

병점댁의 한 마디에 머쓱하니 웃고 마는 덕구 형
하얀 달 항아리 위로 매화도 슬며시 붉다
― 박제영, 「연분」 전문

사실 아직도 저는 형수의 진짜 이름은 모릅니다. 다만 그 사연이 소설 쓰는 내 친구 김도연의 소설 「떡―병점댁의 긴 하루」에 나오는 그 병점댁과 무척 닿아 있다 싶어서, 그냥 병점댁이라 부른 것이지요. 아무튼 지리산 자락 구례에서 산수유 키우고 작약 키우면서 또 형수와 함께 도자기도 구우면서 ‘불행 끝 행복 시작’ 그렇게 잘 살고 있어 좋았는데, 그렇게 잘 살거라 믿고 있었는데, 무소식이 희소식이려니 가끔 전화로만 안부 물으며 몇 년의 세월이 또 흘렀는데, 뜬금없는 부고를 받았습니다. 형이 죽었다는 거짓말 같은 소식을 말입니다.

개울에 물괴기들이 살랑살랑 거리는 거 보면
꽃샘도 잠깐이겠다
시방 산수유가 활짝 필 것 같응께
제수씨랑 애들이랑
한번 내려온나

휴가는 댕겨왔나?
지리산 자락 지날 거면 꼭 들렀다 가라
계곡물에 발 담그면 더위가 싹 가신다
평상도 하나 맹글었다
참외랑 수박이랑 잘 익었응께 맛도 좀 보고

그리 바쁘나?
단풍이 붉어도 저리 붉을 수가 없네
미친년 널뛰듯 가슴이 콩딱콩딱
보면 니도 환장한다
요번엔 꼭 내려온나

미안해 형, 너무 늦어서 미안해

괘안타 괘안타 웃고 있는
바보처럼 웃고 있는
세상에 없는, 덕구 형
― 박제영, 「덕구 형」 전문

사진 속의 형은 어처구니 없게도 활짝 웃고 있었습니다. 형이 만들었다는 평상에 앉아보지도 못했는데 그새를 못 참고 먼저 가는 게 어디 있냐고 떼를 써보기도 했지만 형은 끝내 대답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덕구 형을 보냈습니다. 함께 내려온 친구들과 소주를 주거니받거니 하는 사이 몇 차례의 곡소리가 지나고 곡소리 너머 구석에서 고개만 숙이고 있는 병점댁이 어렴풋이 보였습니다. 그게 내가 본 형수 병점댁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생각하면 병점댁의 팔자도 무척 기구하지요. 이역만리 타국에서 어렵사리 두 남자를 만났는데, 두 남자 모두 세상을 떠나보냈으니, 그 팔자 참 기구하지요. 덕구 형이 죽고 이년 쯤 되었을까. 이번에는 병점댁이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구례를 떠난다고.

나라를 망쳤으니 망할 년, 망초라 불렀다지요
분이 안 풀려 개 같은 년, 개망초라 불렀다지요

덕구 형이 황망히 세상을 떠나고 몇 번의 계절이 지났을까
병점댁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오늘 구례를 떠납니다 먼 훗날 다녀가실지 몰라 산수유 밑에 달항아리 묻어두었습니다

남편 잡아먹었다고 집안 말아먹었다고 시댁에서 내쳤잖여
집이며 밭이며 보험금까지 전부 시댁에서 가져갔잖여

읍내 터미널에서 딸내미랑 구걸하는 걸 봤다는 소문
미쳤다, 섬에 팔려가 작부가 됐다는 소문

덕구 형과 가꿨던 비탈밭에 붉은 작약 대신 개망초가 하얗게 번졌던 그해 유월,
소문은 흉흉하고 무성했지만 몽골 여자 병점댁을 실제로 본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날 달항아리 속에서 무엇을 보았냐구요 미안합니다 그것만은 차마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상상에 맡기지요
망초, 나라를 망친 꽃이 아니라 고향을 잃은 꽃입니다
― 박제영, 「개망초」 전문

십 년도 더 지난 이야기입니다. 지금 병점댁은 어디서 무엇을 하면서 살고 있을까요? 얼굴이 참 까맸던 그 어린 딸도 이제는 다 커서 어른이 되었을 텐데, 두 모녀는 잘 살고 있을까요? 산수유가 노랗게 필 때면 병점댁의 소식이 아프도록 궁금해지는 까닭입니다.

“산수유는 다만 어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서 피어난다. 그러나 이 그림자 속에는 빛이 가득하다. 빛은 이 그림자 속에 오글오글 모여서 들끓는다. 산수유는 존재로서의 중량감이 전혀 없다. 꽃송이는 보이지 않고, 꽃의 어렴풋한 기운만 파스텔처럼 산야에 번져 있다. 그래서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
─ 김훈, 「자전거여행」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