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황병기를 생각한다

“장사는 망하려고 하는 거야.” 황병기 선생께선, 가끔 이렇게 말한다. 일반인에겐 좀 이해하기 힘들거나, 꽤 거부감을 들게 하는 발언이다. 생전 그에게서 몇 번을 들었다. 이런 말을 하면서, 늘 등장하는 거리가 있다. 이대 앞으로 통하는 거리다. 그가 근무했던 이화여자대학교 정문에서 지하철 이대입구까지 걸어 나오는 양옆의 가게들이다. 1년도 못가서 망하는 가게도 많고, 대개 3년이 고비란다. 길면 10년을 버티게 되는데, 결국 이런 가게도 사라진단다.
아마 ‘이대 앞’을 황병기만큼 자주 걸었던 사람도 드물 거다. 반평생을 이화여대와 관련했다. 이 길을 숱하게 걸었던 황병기의 증언이라면, 또 평소에 확실치 않은 얘기는 절대 안 하는 사람의 얘기하면, 타당성이 있는 얘기가 아닐까? 이런 얘기를 하면서 꼭 등장을 하는 빵집이 있다. 바로 이대 정문에서 나와서, 오른쪽에 있던 유명빵집이다. 늘 사람들로 북적북적했던 그 빵집마저도, 근처에 새 빵집이 생기고선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결국 문을 닫았다.
우리는 누구나 심정적으로 사업의 성공을 바란다. 또 나와 주변이 그래주길 바란다. 실제 많은 사람들이 또한 장사나 사업에서 ‘성공의 기쁨’을 경험하지만, ‘결국은 망한다’는 게 그의 결론이다. 그의 이런 얘기에는, 자신의 실제 경험이 깔려있다.

여러 장사를 전전한 황병기, 망해본 경험이 있는 황병기
황병기하면, 일반인들은 보통 셋을 연결 짓는다. 서울대 법대, 가야금 작곡가, 이대 교수다. 그런데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교수가 되기까지 그는 많은 장사와 사업을 했다. 사업의 수완은 집안 혹은 부친의 대물림이었다. 황병기 또한 사업에 재미도 있고, 재주도 있었단다. 그러나 그런 사업은 한 때는 이익이지만, 결국은 손실이라는 거다. 비유컨대 도박을 하는 사람처럼 무척 재미도 있고 성공할 것 같지만, 그런 재미에 빠졌다가 결국 망하게 된다는 얘기다.
그가 했던 직업 혹은 장사의 하나가 바로 ‘영화’였다. 황병기는 한 때 ‘명동극장’이라는 영화관에서 일했다. 직함은 명동극장의 상무요, 직책은 명동극장의 지배인이었다. 영화의 배급과 제작에 관여했었다. 황병기는 원래 영화에 관심이 많았고, 이 시절에 더욱 많은 영화를 보았다.
황병기는 자신의 인생에서 ‘영화’와 관련된 것들을, 생전에 얘기를 많이 하지도 않았지만, 굳이 숨기려 하지도 않았었다. 단지 황병기란 사람을 다루는 기사에서, 이런 것들이 거의 빠져있었다. 황병기를 ‘이색적인 가야금 연주가’나, ‘지적인 국악인’으로 설정해놓고 접근하려는 시각에선, 이런 황병기의 ‘장사 편력’이 무의미하거나,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꼭 하나 중요하게 짚어야 할 것은, 황병기가 대학졸업과 동시에 생긴 서울대학교 국악과에서 4년 동안 가야금 강사로 있었지만, 이 시기를 포함해서 이화여대 교수가 되기까지 몇몇 ‘직장’과 ‘장사’를 하면서, ‘사업’이란 걸 놓치지 않았지만, 이런 시기에도 그는 ‘가야금’올 놓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서 도박에 미친 사람이 자신의 직업과 가족을 등한시하는 것과는 달리, 그는 어디서 어떤 일을 하다가 또 다른 직종을 바뀌었을 적에도, 황병기는 날마다 꾸준히 가야금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러하기에 「침향무」(1974년)라는 걸작이 나올 수 있었고, 그것이 황병기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표곡이 된 것이다.

그 시절의 주한미공보원(USIS-Korea)을 아시나요?
황병기와 영화는 어떻게 연결될까? 「억지봉(鳳)잡이」(영어제목 : Birds of a Feather)라는 영화가 있다. 1961년과 1962년에 걸쳐서 주한미공보원(USIS-Korea)에서 제작한 영화다. 이진섭의 오리지널 시나리오 ‘유유상종’을 바탕으로 해서, 양승용(양프로덕션)이 연출을 했다. 1962년에 개봉을 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걸쳐서, 주한미공보원이 한국영화에 끼친 직접적 혹은 간접적 영향은 가볍게 볼 수 없다. 참고로, 올해 타계 20주기를 맞아서, 한국영화계에서 새롭게 더욱 주목을 받고 있는 영화감독 김기영(金綺泳, 1919년 10월10일 ~ 1998년 2월5일)도 바로 주한미공보원을 통해서 영화를 배우고 익힌 분이다. 주한미공보원은 주로 ‘리버티 뉴스’를 제작하였고, 이것이 바로 요즘 한국의 TV 등에서 추억의 뉴스로 소개하고 있는 ‘대한늬우스’이다.
이렇게 ‘리버티 뉴스’를 주로 전담하던 주한미공보원이 ‘극영화’에 눈을 돌렸고, 가장 처음으로 제작한 영화가 김기영 감독의 「주검의 상자」(1955년)다. 주한미공보원이 야심차게 준비한 극영화의 제 2탄이 「억지봉잡이」. 우리의 일상 표현 중에서 ‘봉(을) 잡다’란 말이 있지 않은가! ‘봉 잡다’는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진귀한 봉황을 잡는다’는 뜻으로, ‘매우 귀하고 훌륭한 사람이나 일을 얻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사전에 정의되어 있다.

망할 확률이 낮고, 수입이 짭짤한 직업
이 영화는 당시의 최고의 능력자들을 섭외해서 영화를 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황병기가 영화음악을 맡았고, 주인공은 당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희극배우 김희갑(1923~1993)였다. 이 작품은 조선시대의 관직을 사고파는 부패함과 불합리함을 배경으로 한 계몽성이 있는 희극물이었다. ‘억지’는 ‘잘 안될 일을 무리하게 기어이 해내려는 고집’을 뜻하는데, 이 영화는 이렇게 무리하게 관직을 얻어서 출세하려는 사람을 풍자적으로 그려낸 영화였다. 이 영화는 아쉽게도 필자 또한 못 봤는데, 필름은 현재 남아있지 않는지 궁금하다.

사업의 기본 마인드: 손해볼 일은 하지 않는다
당시 주한 미공보원과 이 영화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알 수 있는 짧은 한 줄이 있다. 당시 신문에서는 「공항일기」라는 제목으로 당시 김포공항에서 입국하고 출국하는 주요명단을 신문에서 공개하였다. 1962년 3월22일자 ‘동아일보’ 3면의 「공항일기」에선 주한미공보원의 영화제작과장 ‘함브리(험프리) W. 레츠’가 「억지봉잡이」의 ‘칼라 필름’ 현상차(現象次) NWA편으로 하오에 출국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사업’적인 면에서 결코 수완이 없지 않았던 황병기는 짐작컨대 당시로서는 큰 돈을 받고 이 영화음악에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기영과 같은 영화감독이나 영화 관련자가 이렇게 미공보원과 관련된 것은, 첫째 열악한 한국과는 달리 미국의 당시 최첨단의 영화작업을 위한 장비를 사용할 수 있었던 강점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둘째는, 당시 한국에 비해서 임금이 높고 혹여 노동의 대가를 떼먹히는 일은 절대 없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당시의 영어가 가능하며 예술적인 성향을 갖춘 인재들이 주한미공보원과 연결되어서 작업을 하게 된 것도, 이런 두 가지 이유를 배제할 수 없을 거다. 사업과 장사에 대해서 부친으로 이미 대물림되었고, 사업적인 계산이 빠른 황병기는 분명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것이라 짐작된다.

춘향전에서, 흥한 신상옥, 망한 홍성기
그렇다면, 영화음악을 통해서 황병기의 가야금을 직접 들을 수 있는 첫 번째 영화는 무엇일까? 신필름(신상옥 감독)이 제작한 「성춘향」이다. 신상옥 감독의 아내이기도 한 최은희가 ‘춘향’, 김진규가 ‘몽룡’을 맡은 작품이다. 이 영화의 개봉명은 「성춘향」이지만, 신상옥 감독은 평소에 이 영화를 「춘향전」이라고 했다.
이 영화의 제목을 「성춘향」이라고 한 것은 당시 두 편의 춘향관련 영화가 격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의 매스컴에선 춘향전(春香傳)을 ‘춘향전(春香戰)’이라고 까지 했다. 두 편의 영화가 자존심을 대결하는 커다란 전쟁 같았기 때문이다. 또 한편의 「춘향전」은 홍성기가 연출을 하고, 김지미가 춘향을 맡았다. 이들 또한 부부였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최인규 문하에서 영화를 익힌 동문이자 라이벌이기도 했다. 개봉하기 전 두 영화의 싸움은 치열했지만, 개봉하고 선 「성춘향」의 완승(完勝)이었다. 신상옥-최은희의 영화가 승리한 데는 여러 요인이 있으나, 영화음악도 한 몫을 했다. 신필름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영화음악가가 정윤주(鄭潤柱, 1918~1997년). 그 신필름이 제작한 많은 영화에서 영화음악을 맡았다. 1960년대 사극음악의 전형적 기틀을 만들어낸 작곡가가 정윤주다. 그는 통영출신이다. 흔히 한국사람들은 통영출신의 음악가 하면 윤이상만을 생각하는데, 그래도 점차 정윤주라는 존재를 알게 되어서 다행이다.
정윤주와 황병기의 관계에서도 청출어람(靑出於藍)이란 표현이 가능할까? 정윤주에 의해서, 황병기는 영화음악을 알고, 오선보로 기보하는 가야금 음악 및 서양음악과의 협연에 더욱 익숙해졌다. 또 다른 작곡가인 정회갑과도 작업을 하긴 했으나, 이런 경험들이 황병기를 서양음악과의 협연을 전제로 해서, 자신의 음악과 자신을 가야금 연주자로서 알리는데 더 큰 기여를 했으리라고 생각한다. 장사 및 사업적인 얘기의 연장선이라면, ‘정윤주’ ‘정회갑’ ‘억지봉잡이’와 ‘성춘향’은 이제 서서히 뜨기 시작하는 ‘황병기’라는 브랜드의 가치를 높여주는데 매우 절대적인 역할을 해 준 사람과 작품이다.
정윤주가 영화음악을 맡은 「성춘향」은, 전통음악에 충실한 「춘향전」과 다르게, 요즘말로 하면 이른 ‘퓨전국악’을 영화음악으로 택했다. 서양의 오케스트라와 가야금이 만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당시 한국의 가야금 연주가 중에서 서양의 오선악보를 잘 보면서 가야금을 연주할 수 있는 가야금 연주가하면 단연 황병기가 첫 번째 손 꼽혔다. 그래서 황병기는 정윤주가 영화음악을 맡은 「성춘향」에서 가야금으로 참여했다. 그런데 훗날 정윤주 작곡의 「황병기 주제에 의한 가야금협주곡」(가야금과 서양오케스트라의 협연곡)을 만들었다. 특히 정윤주는 황병기의 「가을」과 같은 가야금곡을 좋아했다. 예전 라디오 방송에서는 새벽 시간대에 정파(停波)가 있다가 배경음악과 함께 새벽 4시 혹은 5시에 다시 방송을 시작했다. 이 때 새벽에 방송을 다시 시작할 때 반복적으로 내보낸 곡이 황병기의 가야금 독주곡이었다. 정윤주는 1960년대에 자신의 영화음악을 위해서 가야금 선율을 만들어서 황병기에게 주었고, 이것이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했다. 그런데 20년쯤 세월이 지난 1980년대에는 황병기의 오리지널 가야금을 듣고, 그걸 바탕으로 해서 서양 오케스트라의 협연곡을 만든 것이다. 이 작품은 발터 길레센이 지휘하는 KBS교향악단에 의해서, 양승희(현, 인간문화재, 김죽파류 가야금산조 연주가)가 초연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황병기의 음악(가야금)을 영화음악으로 사용한 작품은 또 있다. 「수절」 「문」 「영원한 제국」. 또한 외국에서 제작한 「어떤 나라」란 북한을 소재로 한 작품이 있는데, 이 얘기는 다음 호에 보다 자세히 하겠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