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스크랩북

언제인지 모르게 나는 수줍음을 많이 타는 그런 소년(少年)으로 성장하여왔다. 이것은 필경 내가 스스로 말더듬이임을 자각하게 되면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 나서거나 말하는 것에 두려움이 있어서 혼자서 노는 그런 독유동형소년(獨遊童型少年)으로 굳혀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손위의 누나가 노래를 좋아해서 나는 누구보다도 많은 노래를 알았고, 혼자선 늘 노래를 불렀는데 정작 학예회(學藝會)나 교회(敎會) 성탄절 같은 데에는 한 번도 출연(出演)해보지 못했다. 그것은 말더듬이니까 노래도 못하려니 해서였던지 도대체 출연자 후보선정 때 어느 아이도 나를 호명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학예회(學藝會) 계절은 늘 쓸쓸하였다.
아이들이 무대에 올라서서 노래하든지 유희()하는 것이 그리도 부러울 수가 없었던 것. 더구나 그 애들의 노래 실력들이 나보다 훨씬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속상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던 것을 기억한다.
아직 학교 들어가기 전의 일 같은데―지금 생각하면 나는 누구 못지않게 자기 현시욕(顯示欲) 같은 것이 강했던 아이였다. 우리 고향에 만년좌(萬年座)라는 작은 극장에서 누나네 학교 학예회(學藝會)가 있었을 땐데 나는 생전 그런 2층까지 사람이 꽉 차 있는 화려한 곳은 처음 가본 터라 그렇게 신나고 흥분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맨 앞자리 목까지 올라오는 높은 무대 앞에 같은 또래와 같이 서서 구경을 하게 되었다.
막이 오르자 예쁘게 차린 여자아이들이 나와서 하는 독창(獨唱)이며 합창, 그런데 그 모두가 내가 너무도 잘 아는 노래가 아닌가. 그래서 필경 나도 모르게 그 노래들을 따라 같이 불렀던 모양. 공연이 끝나 집에 돌아왔는데 누나가 벌써 와서 어머니한테 “동화가 우리 노래를 따라했기 때문에 창피하고 부끄러워 이제는 나다닐 수 없다…”고 일러바친 것이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누나 말에 “그랬기로 서니 얼마나 하고 싶었으면 그랬겠니…”로 됐던 모양이 되었다. 그러자 누나는 울면서 나에게 덤벼들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되는 것은 그때 어머니가 차라리 누나편이 돼주셨으면―하는 심정이었던 일이다.
막상 누나가 울면서 그렇게 나를 다그치니까 불현 듯 나는 아까 극장에서 또래들이 이상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던 일이 떠오르고, 뒤에 앉은 어른들이 몇 번이고 “조용해…” 하시면서 나를 제지하던 생각이 나서 내가 누나의 소중한 것을 훔친 것 같은 그런 부끄러움과 뉘우침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렇지만 그때 나는 슈퍼맨처럼 넓고 높은 극장공간을 날아 모든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해줄 수 없었던 아쉬운 마음으로 분 바르고 등장한 그 소녀들을 바라보고 있었던 나. 그 후 성장하여 중학생이 된 후에도 이런 자기를 돋보이게 하고 싶은 마음은 별로 변함없이 계속 날개를 펼치고 있었던 일들도 기억한다.
어떻든 이런 나의 꿈이 이루어질 뻔한 것은 보통학교 4학년 때 시골학교로 전학하면서였다. 전학을 간 그 학교는 토요일마다 여흥(餘興)시간이란 것이 있어서 그 여흥시간 첫 프로그램이 읍(邑)에서 내려온 학생, 바로 나에게 지목된 일이다.
만장박수로 나의 노래가 초대된다. 나는 이런 순간을 얼마나 고대했던가-. 마치 못 이겨 끌려 나가는 표정으로 교단 앞에 섰다. 모든 시선이 나에게 향하고 있지 않는가. 이런 일은 생전 처음 있었다. 가슴이 뛰고 목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았다. 그리고 도대체 나의 선곡(選曲)이 힘든 것이었다. 말하자면 시골 아이들은 모르는 수준 높은(?) 것이었다. 그래서 노래 끝날 때 박수소리는 노래 청할 때와는 아주 딴판이었다. 갑자기 부끄러웠다.
그 때문이기도 했겠지. 여하튼 그 후 나는 많은 사람 앞에 나선다는 것에 아주 단념하게 된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된다.
- 한국음악협회보, 1986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