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스크랩북

무리(群)를 지어 다니는 동물사회(動物社會)에서는 끊임없이 패권() 싸움이 반복된다.
때문에 도전(挑戰) 받고 있는 리더에게는 순간의 방심(放心)도 죽엄과 연결되고 권좌(權座)에서 쫓겨남을 의미한다.
더구나 무리의 생리(生理)는 패(敗)해 쓰러진 어제의 리더에게 결코 동정(同情) 않으며 항상 새 강자(强者)를 따라 새 복지(福地)를 찾아 나선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정치풍토(政治風土)의 비정(非情)이란 것도 말하자면 이런 풍속(風俗)에 연유된다고 보면 오늘의 일련의 정치(政治)사태(事態)는 사회(社會)의 자연(自然)의지(意志)이며 순리(順理)일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어떻든 전(全) 전(前) 대통령의 사과방송(11월 23일 오전 9시 30분)을 들으면서의 감회는 모든 것이 끝나고 새로운 장(章)이 열리는 현장(現場)에 내가 서 있구나 하는 느낌이 그것이었다. 인간사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간에 닫혔던 문을 열지 않으면 그 속을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다. 더구나 그 열린 문을 통과해야만 다음 방문 앞에 다다를 수 있으니 말이다.
말하자면 그의 ‘사과방송’이 우리가 예측한 내용이었다 하더라도 우선 열어젖혀 다음 방으로 전진할 수 있게 했다는 데 큰 뜻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루이 암스트롱이 인류사상(人類史上) 처음으로 달에 도착하는 순간이 TV 중계되는 옛날, 그 정오(正午)께.
나는 광화문(光化門) ‘세루탕’이라는 작은 다방(茶房)에서 그 시간을 지키고 있었다.
나 말고도 주변 사무실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2층 낡은 목조(木造) 건물이 금새 무너져 내려앉을 것 같아 걱정스러웠던 그런 시간.
어떻든 그날 앞으로 2~3분이면 전개될 바로 새로운 세상 앞에서 ‘정말 그가 달 위에 내려앉을 수 있을지…’가 믿어지지 않았던 어리석음을 기억한다.
그처럼 당시의 우리는 그때의 상식을 뛰어 넘는 달과 사람의 관계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때문에 TV에서 그 현장(現場)을 목격한 후에야 스스로의 구속에서 풀려났던 것이다.
태평양(太平洋)전쟁 말기. 어떤 수단으로든지 살아남아야 필연코 올 ‘그날’을 볼 수 있을 텐데… 나는 왜 그런지 그때까지 살아남을 자신이 없었다. 더욱 나를 괴롭힌 것은 ‘그날’에 대한 신념이었다. 진정 ‘그날’이라는 것이 있으며, 오는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회의 그것이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런 때는 없을 것 같은 숨 막히고 막막한 세상 결국은 이렇게 갇혀 있다가 죽어버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이 들 때 절망밖에 내 곁에 없구나 하는 그 사실이 슬펐다.
큰 역사의 장이 열리려는 그 문 앞에서 가까이 다가오는 새 세상 앞에서 나는 늘 그 수레바퀴 소리를 듣지 못하고 망설였던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어떻든 그렇게 ‘8·15’까지 왔으나 피난 간 산골에서는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 어느 날 혼자 읍내(邑內)로 내려왔더니… 시내(市內)는 텅 빈대로 세상은 이미 달라져 있었다.
그것은 일본사람은 모두 떠나고, 군영(軍營)들이 모두 불타고 한 것도 그렇지만 우편국(郵便局) 앞길에 큰 태극기를 단 트럭이 서 있었던 사실이다. 거기에는 북간도(北間島) 용정(龍井)에서 나온다는 피난민 차림의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이때 처음 보는 태극기. 나는 그 순간을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 그저 가슴이 뛸 뿐 이렇게 해도 괜찮을까… 하는 무서움과 근심이 앞섰다. 그때까지도 ‘일본’ 공포 속에 있었다.
그래서 그 태극기는 나에게 마치 오래 떨어져 살아온 낯선 생모를 만나는 것처럼 서먹서먹했던 일들을 기억한다.
울음이나 눈물도 미리 준비된 감정이 있어야 쏟아진다. 그때 태극기 앞에서 나는 울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 TV에서 보면 떨어져 살던 사람끼리 만나자마자 울음 터뜨리는 것을 보면 왠지 가짜처럼 느껴지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새도 임신해야만 지푸라기에 관심을 갖는다고 한다. 눈에 보이지도 않던 그 지푸라기가 임신한 새에게는 뜻이 있게 보이며 그것을 물어다가 둥지를 틀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은 하나의 생리적 연쇄반응 같은 것. 무엇이든 그 경지에 이르러야 다음 문이 열리며 첫 번째 반응이 있어야 다음 반응으로 이루어지고 또 그 다음으로 연결되는 것이지 순서를 건너 뛰어넘을 수는 없다는 것임을 알게 된다.
필경 우리의 남북통일(南北統一)도 이런 순서를 거쳐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분단(分斷)된 국토(國土)가 하나로 환원한다는 것은 너무도 옳은 진리(眞理)이고 확실한 것임에도 아직 나는 ‘정말 그렇게 될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우리 생전에 와질까…’ 하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내 귀는 역사 앞에 늘 귀머거리처럼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체 그것을 꿰뚫어보는 ‘경지’는 언제 터득하는 것일까.
- 공간(空間), 1988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