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 춤 스크랩북

단풍든 후박(厚朴)나무 잎새처럼 볼품 있게 크고 대견한 낙엽(落葉)이 또 있을까.
나는 초겨울 행사로 한마당에 가득히 떨어져 깔린 이 낙엽들을 모아 긴 부지깽이를 만들어들고 불을 지핀다.
낙엽의 불길과 잎새 타는 냄새에는 언제나 어릴 때 아버지 곁에서의 그런 따스함이 있어 향수 같은 것이 있다. 고향의 우리 아버지도 늘 이맘때면 마당의 낙엽을 태우셨고 나는 나대로의 부지깽이를 만들어들고 그 불길을 다루었었다.
때로는 밤늦게까지도 불길을 지켜야 했으나 그 시간이 그리도 즐거울 수 없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낙엽이 타고난 자리에 수북이 쌓인 하얀 재. 내가 죽으면 낙엽처럼 상쾌하게 불타버렸으면…, 하는 꿈을 키운 것은 아마 여기서부터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일전 민속박물관에서 있은 상장례전(喪葬禮展)을 일부러 찾아가 보았었다. 요즘은 왜 그런지 신문부고란(新聞訃告欄)이나 죽음의 기사(記事)에 대해 관심이 많아졌음이다. 죽음이 내게 가까이 느껴지는 탓일 것이다. 어떻든 그날은 일요일이라 국민학교 애들과 꼬마를 데리고 온 가족들로 숙연할 수 있었던 전시실내 분위기가 온통 법석이어서 사실 음미하고 싶었던 죽음의 풍경을 대충 대충 빠른 걸음으로 치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거기에 차려진 사자풍속(死者風俗)이나 절차(節次), 유물(遺物) 같은 것이 그처럼 실감 있게 와 닿을 수 없었다. ‘실감’이란 말보다 나와 가깝게 느껴졌다는 말이 더 가까울 것이다. 젊은 때와 확연히 달라진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구나 하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예컨대 출토(出土)된 썩고 얼룩진 수의(壽衣)의 경우는 그것이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니고 바로 내가 입고 있는 나의 것일 수 있다는 생각, 그리고 다음 순간 젖은 저 옷 때문에 끔찍스럽게도 추웠다는 그런 생각이, 그러나 지금 이 현실의 나야 화장(火葬)해버릴 테니까 저런 옷 입지 않아도 된다는 일종의 안도감 같은 행복감을 맛본다.
나의 어머니는 아주 일찍부터 잘 누빈 자기의 명주 수의(壽衣)를 손수 만들어 장롱 속에 고이 간직하셨다가 92세에 그 옷으로 묻히셨다. 그때 그 옷의 인상은 어둡고 찬 땅속에서도 포근할 것 같게 느껴지는 그런 풍부한 느낌의 것이었다.
꼭 한번 서대문(西大門) 화장(火葬)터에서 치르는 친구 아버지의 화장(火葬) 모습을 지켜본 일이 있다. 그때까지도 나는 화장(火葬) 그 자체에 부정적이었을 때였다. 말하자면, 죽었는데 또 타버리고 하면 두 번씩이나 죽는 것과 같다는 말을 들으며 자라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화장(火葬)된 친구 아버지가 뜨거운 가마 속에서 나온 것을 보니 그렇게 청결하고 정갈할 수가 없었다. 그때가 추운 겨울이어서 그랬는지 그 철관에서의 뜨거운 열기마저도 좋았던 것을 기억한다.
물론 나의 몸이 삽시간에 불타버린다는 것은 얼마나 뜨거울까. 국민학교 때 예방주사를 맞기 위해 윗통을 벗고 낭하에 한 줄로 쭉 서서 그 아픈 순서를 겁먹으면서 기다렸던 것처럼 그러나 막상 주사바늘이 팔뚝에 꽂힐 때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던 경험처럼, 정작 화장의 순간은 홀가분한 해방을 맛볼 것 같은 심정이다.
사실 땅속에 묻혀 오랜 세월을 두고두고 썩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불결하지 않은가. 더구나 훗날 지난여름 장마 때 공원묘지를 휩쓴 그런 산사태 같은 경우를 당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러면 흉한 나의 해골이 태양볕 아래 노출된다는 것을 상상하는 것부터 부끄러워진다.
말초 혈관에 피가 통하지 않는 버거스 병(病)으로 바른편 무릎 아래를 잘라버린 나의 가까운 친지가 있다. 이분의 말이 어떤 밤이면 잘라버린 발의 엄지발가락이 가려워서 한잠도 이루지 못한다는 이야기였다. 같이 살아온 신체란 그 일부분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렇게 영혼이 서로 교류되고 있다는 말이 아닐까.
만일 나의 시체(屍體)가 한곳에 있지 않고 따로따로 떨어져 살고 있다고 가정하면 나의 영혼은 없어진 부분을 찾기 위해 영원히 허공을 떠다닐지도 모른다. 가을 낙엽처럼 태워져 정원에 뿌려져도 좋은 한곳에 한 줌 모아 땅속에 묻어줘도 좋고 사실 삼대(三代) 가기가 힘들다는 묘(墓)를 만든다는 것. 좁은 영토의 백성으로서 사치 같기도 하다.
정말인지는 모르나 인도에는 묘(墓)가 하나뿐, ‘타지마할’밖에 없다지 않는가. 정말 멋지다는 생각이 든다. 긴 역사 속에 우리는 한 잎의 후박 잎새거나 감나무 잎새에 불과하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공간(空間), 1990년 12월호 본지고문(本誌顧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