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살롱

손가락질 하면서도 빠져드는 것이 TV 막장드라마다. 모략과 배신, 치정과 폭력이 난무하고 주연·조연·단역 할 것 없이 악다구니로 채워져 품위와 거리가 멀지만 꽤 높은 시청률을 찍는다는 점에서 방송사 입장에서 포기하기 힘든 장르다. 하지만 막장드라마를 무색케 하는 현실은 또 어떤가. 특히 정치판의 어이없는 막말과 사연을 우리는 나날이 목도한다.
비근한 예로 자유한국당과 거대 경찰 조직 간에 벌어진 ‘개싸움’이 있다. 한국당 대변인이 “정권의 사냥개(경찰을 지칭)가 광견병에 걸려… 닥치는 대로 물어뜯기 시작했다(자기 당 인사에 대한 경찰 수사를 뜻함). 미친개는 몽둥이가 약이다”라고 거친 말폭탄을 터뜨렸다가 거센 역풍을 맞아 사과했다. 사회 지도층 전방위로 번지는 미투(#MeToo) 시리즈는 순번만 붙여 놓으면 그 자체로 완벽한 막장 연속극이 된다. 이른바 진보인사들이 많이 걸린 걸 보면 정치판 막장에 좌우가 따로 없다.
미국도 별난 대통령의 취임 후 막장드라마가 줄을 잇는다. 최근엔 전직 포르노배우, 플레이보이 사진모델과 트럼프 대통령의 성 추문이 술안주 감이다. 매매춘 덮어주겠다고 끼어들어 한편으론 관계 맺은 여성들의 폭로를 부추기면서도 양쪽에서 거액 받아 챙긴 치정 전문 브로커 변호사들은 막장드라마 조연급쯤 된다.
사실 탄광 갱도의 끝을 뜻하는 ‘막장’은 고생하는 광부들 심기를 헤아린다면 함부로 쓰면 안될 말이다. 오래 전 대한석탄공사의 한 최고경영자는 언론사에 이런 호소문까지 보냈다. “막장은 폭력과 불륜이 난무하는 곳이 아니라 에너지 자원을 캐내는 산업현장이자 삶의 터전입니다. 막장이란 말 함부로 쓰지 맙시다.”
정치판을 묘사하는 표현 중에 ‘정치공학’이란 말이 있는데 여기엔 이공계 전문가들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가령 “미투의 정치공학적 접근을 경계한다” “개헌이 집권세력 정치공학의 희생양이 되어선 안된다” 는 주장이 나오는 걸 보면 ‘정치공학’의 문맥은 부정적인 구석이 많아 보인다. 정치학(Political science)이 정치에 대한 과학적 접근이라면 정치공학(Political engineering)은 현실정치의 실용적·술수적 이미지가 강하다. 저 멀리 1970년대 유신 독재나 권위주의 정권 시절, 국가 정보기관을 등에 업은 공작정치의 냄새도 풍긴다.
미투로 생생한 막장드라마가 드러나는 와중에 한 여성단체 회합에서 ‘미망인’이란 말이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고 한다. 미망인(未亡人)은 문자 그대로 남편 따라 죽지 못하고 살아있는 사람이란 뜻이다. 「춘추좌씨전」이란 중국 고전에서 따온 유식한 한자어 같지만 이 말을 남자나 제3자가 쓴다면 이런 여성 비하가 또 없다. 홀아비에게 미망인이란 말을 결코 쓰지 않는다. 한글 전용 세대를 수십 년 살다 보니 한자어의 참뜻을 모른 채 그냥 쓰는 건가.
정쟁(政爭)과 치정(癡情)으로 어지러운 세상이다. 막장드라마·정치공학·미망인처럼 정체불명의 언어까지 기승을 부리면 설상가상이다. 국립국어원의 표준어 채택 원칙 중에 ‘오랜 기간 많은 사람이 쓴 말’이란 상식적 기준이 있다. 하지만 이처럼 이상한 말들이 널리 유통되는 걸 계도 않고 방치하는 건 국어정책의 중우정치다. 표심에 혈안이 된 포퓰리즘, 세금퍼주기식의 복지정책과 뭐가 다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