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무기

폴 테일러(Paul Taylor, 1930년~ )는 평론가들로부터 현존하는 가장 훌륭한 안무가로 인정받음과 동시에 세계 현대춤계에서 영향력 있는 위치를 지켜오고 있다. 미국 내 일반 대중으로부터도 선호도가 높은 예술가라는 사실을 입증하듯 링컨센터 데이비드코크극장(Lincoln Center David H. Koch Theater)에서 3월 6일부터 3월 25일까지 3주간 걸친 공연에 관객들을 가득 채웠다.
그는 이번 시즌공연에 본인의 작품 14개와 초대 안무가들의 작품들로 대관일정을 채웠다. 초대받은 안무가들로는 이사도라 덩컨(Isadora Duncan, 1878년~1927년), 트리샤 브라운(Trisha Brown, 1936년~2017년), 릴라 요크(Lila York, 1948년~ ), 더그 바론(Doug Varone, 1956년~ ), 그리고 브라이언 아리아스(Bryan Arias, 1987년~ )였다.
폴 테일러는 본인의 작품들뿐만 아니라 미국을 대표하는 역사적 현대무용가들의 작품들을 같이 무대에 올림으로써 미국 현대춤의 시작과 끊임없이 번성하는 모습을 보여준 또 다른 증거의 역사를 만들었다.

* 폴테일러아메리칸모던댄스 폴 테일러 안무 『프로메테우스의 불(Promethean Fire)』(3월10일 David H. Koch Theater)
『프로메테우스의 불』은 「미국 댄스 페스티벌(The American Dance Festival)」에서 2002년에 초연된 작품이다. 검은색 벨벳을 원단으로 한 탱크 슈트 의상은 놀라울 정도로 작품과 잘 맞아 떨어진다. 16명 무용수의 끊김 없는 동선 변화의 물결은 검은 의상임에도 불로 형상화되어 보인다.
작품이 시작되면 두 명의 남, 여 무용수들로부터 불이 발화된다. 불은 다른 무용수에게 전달되며 초기에 형성했던 대칭을 깨뜨리고 수평으로 번진다. 움직임의 물결은 한 줄에서 다른 줄로 이동되고, 한 줄로 다른 줄을 만들어내며 불길을 키워나간다. 무용수들의 동작은 매우 자연스럽지만, 동작의 흐름에 일관성은 만들어내지는 않으며 그들의 다음 방향을 예측 못하게 한다. 작품은 무용수들의 독특하며 개별적인 개성을 아낌없이 보여주는데 폴 테일러가 무용의 기본적인 소재를 무용수로 생각해 작품을 만든다는 점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프로그램 노트에 오셀로의 독백 “타오르는 촛불아, 너는 껐다가도 뉘우치면 다시 켤 수도 있다. 그러나 온갖 수공을 들여 만든 자연의 본보기인 그대의 촛불은 한번 꺼버리면, 다시 불을 밝힐 수 있는 프로메테우스의 불을 찾을 길이 없다”를 적어 놓는다. 이는 작품을 통해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를 다시 쓰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프로메테우스의 불』이라는 추상적 상징성을 통해 용서와 구원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프로메테우스의 불』은 웅장함을 넘어선 위엄과 영적인 차원까지 느껴지는 작품이다.

* 폴테일러아메리칸모던댄스 더그 바론 안무 『반감기(半減期 Half Life) 초연』 (3월10일 David H. Koch Theater)
더그 바론은 현대춤 안무가로 뿐만 아니라 오페라, 뮤지컬, 영화 등의 연출가로서 그가 일하는 장르의 범위는 매우 다양하다. 1986년에 창단된 본인의 무용단이 있음에도 이번에 초연된 『반감기』는 폴테일러무용단과 호흡을 맞춰 공연했다.
『반감기』라 함은 방사성 원소가 붕괴 혹은 다른 원소로 변할 때 기본이 되었던 양이 값의 절반으로 줄어드는데 걸리는 시간을 말한다. 물론 단어의 의미는 다양한 방식으로 적용될 수도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핵 물질로 인한 원소가 절반으로 줄어드는 데 필요한 시간을 말한다.
노란 형광을 띈 천장 조명은 시작부터 무대 절반까지 내려와 있다. 내려져 있는 조명으로 인해 무대는 답답하다. 더군다나 파스텔 색조의 의상과 대비되며 공포감이 연출된다. 무용수들은 공연 처음부터 끝까지 종횡무진 무대를 누빈다. 가끔 다른 무용수와 물리적으로 연결되기도 하지만 이러한 접촉은 일시적이다. 공격적이고 열광적인 다양한 동작들을 보여준다. 더그 바론은 형광의 무대 조명을 반으로 내려놓음으로써 핵폭발의 여파를 가시화하고 갑작스럽게 닥칠 수 있는 두려움을 시각화시킨다. 절반으로 내려와 있던 형광의 천장조명이 또 다른 절반으로 내려오면서 작품이 마무리된다.
더그 바론은 작품을 만들기 전에 무용수들에게 “에너지 자체가 되는 것”을 주문했다고 한다. 주문에 따라서 각 무용수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힘으로 움직이는 원자 입자의 에너지처럼 연기했다. 작품을 소화해 낸 12명의 무용단원들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다. 더군다나 성향이 다른 객원 안무가의 작품을 흡수하고 표현한 그들이 놀라울 뿐이다.
난해한 주제 선정으로 인해 안무가의 작품 의도를 이해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단지 더그 바론이 연출한 기발한 아이디어의 무대 세트와 조명활용 그리고 무용수들의 연기력과 그들의 기량을 즐기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던 작품이다.

* 이사도라 덩컨 안무 『이사도라의 무용(Dances of Isadora) 1900~1924년 작품』(3월18일 David H. Koch Theater)
이사도라덩컨무용단을 이끄는 로리 빌리러브(Lori Belilove)가 연출과 지도를 맡고 뉴욕시티발레단의 수석 단원인 사라 미언즈(Sara Mearns)가 이사도라 덩컨의 역할을 맡아 1900년부터 1924년까지 공연되었던 솔로 작품 10개를 선보였다.
이사도라 덩컨의 예술을 요약해보면 첫째 자연스럽다는 것, 둘째 고대 그리스의 정신을 부활시켰다는 것, 셋째로는 음악을 무용에 종속시켰다는 것으로 말할 수 있는데 이번 작품들을 통해 세 가지 요소를 잘 나타내고 설명해주었다.
누구나 이사도라 덩컨이 현대춤 역사의 시작이고, 현대춤의 어머니로 불리며, 스카프가 차의 뒷바퀴에 감기며 숨을 거둔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 외에 그녀가 한창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에 두 자녀를 자동차 사고로 잃고, 이후 러시아의 시인 세르게이 예세닌과의 불행한 결혼 생활과 그의 자살로 인한 파경, 이후 고국인 미국으로 돌아와 공연하지만, 관객들로부터의 외면 등등 이사도라 덩컨의 불행했고 힘들었을 개인사를 아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사라 미언즈의 춤은 훌륭했다. 하지만 솔로는 군무와는 달리 똑같은 동작을 하더라도 누가 춤추느냐에 따라 작품의 느낌과 전달되는 감동이 확연히 달라진다. 공연을 접하는 내내 개인의 어두운 과거를 안고 살았던 자유로운 영혼 이사도라 덩컨이 직접 추는 춤이 보고 싶었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고 싶다는 현실적이지 않은 상상과 희망에 빠져들게 한 공연이었다.

* 폴테일러아메리칸모던댄스 폴 테일러 안무 『산책길(Esplanade) 1975년 초연』(3월18일 David H. Koch Theater)
『산책길(Esplanade)』은 폴 테일러가 가장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했던 1960~70년대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당시의 폴 테일러는 서정적인 내용의 아름다움을 녹여낸 경쾌한 분위기의 작품들을 발표하면서 현대무용이 가질 수 있는 다양하고 풍부한 표현방법들을 관객에게 보여주었다. 1975년에 초연된 『산책길』은 이 모든 것이 함축적으로 포함된 그의 수작이다.
춤추는 무용수들의 몸짓과 바흐의 바이올린 협주곡의 아름다운 조화를 보고, 듣고 있자면 작품이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를 굳이 해석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를 깨닫게 된다. 폴 테일러는 『산책길』을 통해 춤이 음악을 어떻게 끌어들였는가 그리고 작은 음절 하나가 어떻게 몸을 움직이게 하는가를 관객들이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잔잔하게 보여준다.
1975년도에 만들어진 작품임에도 현대의 시대 감각에 뒤떨어진다던가 어색한 부분 없이 관객의 마음에 오래 머물 수 있는 완벽한 작품을 만들어냈다. 이는 인문고전에 빠져들 때나 오래된 미술작품에 넋을 잃는 것과 갖은 맥락이다. 끓임 없이 독창성 있는 작품들을 발표하면서도 그 작품들이 시대에 흐름에 영향을 받지 않아야만 비로소 거장이라는 칭송을 받을 수 있다.
폴 테일러 그는 거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