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살롱

너무 일찍 가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화가 황창배(1947~2001)도 그런 이들 중 하나다. 소정(素丁) 황창배는 한국현대미술사에서 선 굵은 작품세계로 촉망받던 한국화가다. 고정관념과 형식적 틀을 혐오했던 소정은 한국화 분야에서 새 지평을 여는 기수로 열기를 뿜어냈다. 그가 쉰 세 살, 한창 나이에 이 땅을 떠났을 때 부음을 받아든 미술계는 아까운 작가를 잃었다고 아쉬워했지만 세월의 변전 속에 그 이름은 점차 잊혀졌다.
「황창배, 유쾌한 창작의 장막」(3월9일~5월20일 소마미술관)은 그의 이른 죽음을 안타까워했던 미술계 지인과 유족의 힘으로 꾸려진 작가 재조명 전이다. 생전에 그의 작품을 웬만큼 봤다고 자부했던 이들도 전시장에 들어서면 깜짝 놀랄 정도로 미공개작이 많이 나왔다. 회화·드로잉·영상·아카이브 등 200여 점 출품작중 70%가 처음 선보이는 것이다. 6개 전시실은 소정의 도저했던 풍자와 시대정신을 보여주며 ‘읽는 그림’의 진수를 보여준다.
소정의 작품이 이토록 잘 보존되고 있는 것은 유족의 힘이 크다. 2017년 4월 서울 연희동에 개관한 ‘스페이스 창배’는 그해 10월에 「파격의 뿌리-철농 이기우·소정 황창배 서예 전각전」을 선보이며 고인의 작품세계를 오래도록 펼쳐 갈 것임을 예고했다. 걸출한 서예가였던 소정의 장인 철농(鐵農) 이기우(1921~1993)는 사위에게 지필묵의 미학을 심어주었다. 붓으로 놀아본 이가 즐긴 경지랄까. 이번 전시는 그 열매를 보여준다.
소정은 ‘한국화의 테러리스트’, ‘무법(無法)의 자유주의자’라 불렸을 만큼 한국화의 오랜 숙제에 온몸으로 부딪쳤던 화가다. 전통의 현대적 계승, 한국적 정체성 찾기, 동시대미술로서의 새 지평을 열어젖히려 좌충우돌했다. 고인은 한국화의 고답적인 틀에 맞서 일탈의 방법과 정신으로 자기 양식을 구축했지만, 그 귀결점은 언제나 우리 것을 향하고 있었다. 여느 한국화가와 달리, 서예와 한학을 제대로 공부했던 그는 문인화의 발상을 토대로 한 민화적이고 현대적인 한국화를 그려냈다.
고인은 1997년 중앙일보 통일문제연구소의 ‘북한문화유산조사단’ 일원으로 참여해 남의 화가로는 처음 북을 방문했다. 북에서 돌아온 뒤 지인들에게 “다가오는 봄에 뭔가 큰 사건을 터뜨릴 거야”라고 전시계획을 알렸으나 암 발병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6전시실 ‘기행 기록’에서 볼 수 있는 북한 풍물과 사람들 스케치는 바로 그 ‘큰 사건’을 위한 밑그림인 셈이다. 여간해서 현장 스케치를 잘 하지 않았다는 그가 남긴 수십 점 북의 모습이 맑고 경쾌한 선묘 속에 생생하게 피어오른다.
소정이 실험하고 모색했던 20세기 한국화의 길은 아직 중도에 있다. 그가 견지했던 불꽃과 무법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