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무기

* 이지현의 『흉금-앞가슴의 옷깃』(3월11일 두리춤터)
이야기는 시간을 앞질러 미래에서 시작한다. 무용수들도 먼저 가 기다리고 있다. 공간은 3층 큰 방이다. 시간의 좌표는 목숨이 다해 육신을 벗은 직후다. 바닥엔 국화송이가 가득하다. 국화 물결 위에 혼백이 된 세 여자가 섬처럼 떠올라 있다. 둘은 앉고 하나는 엎드려 있다. 방으로 향하는 계단은 좁고 어둡다. 영문도 모르고 계단을 오르는 관객들은 숨가쁘고 불안하다. 방 한켠 바닥이 객석이다. 관객들은 숨을 고르며 숨 없는 세상을 마주한다. 그제야 힘겹게 오르던 계단이 저승으로 향하는 굽잇길이었음을 알아챈다. 무덤같은 국화송이 너머로 혼백을 응시한다. 기승전결은 다짜고짜 미래로 달려와 거꾸로 흐르기 시작한다.
죽음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세 영혼은 저승이 생소하고 낯설어 미동도 못한다. 한스러운 읊조림과 애절한 피리 소리에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는다. 그런데 갑자기 엄숙을 깨는 반전이 일어난다. 처연해야 할 세 영혼이 환한 미소를 짓는다. 앙징맞은 표정으로 경쾌하게 움직인다. 쌓인 한을 털어내듯 바닥을 향해 두 팔을 힘차게 뿌린다. 그러고는 셋은 기력을 잃고 쓰러진다. 한결 홀가분해진 듯 다시 일어나 신명나게 몸을 흔든다. 크게 걷고 높이 뛰고 길게 내뻗는다. 장례는 축제로 바뀐다. 흥겨운 영혼은 얼어붙었던 가슴을 달뜨게 해놓고는 떠난다. 수수께끼같은 결말이다. 영혼이 남긴 화두를 풀기 위해 시간을 되짚어 ‘지금’으로 돌아간다.

내려가는 길도 좁고 어둡다. 이번에는 하행 일방통행로다. 삶과 죽음은 함부로 방향을 바꾸고 교차하지 않는다. ‘지금’은 허공에 떠있지도 땅속에 묻혀 있지도 않다. 땅을 딛고 늘 펼쳐져 있다. 그래서 ‘지금’의 무대가 1층인가 보다. 객석은 2층 난간과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다. 무대 중앙엔 셋이 누워 있다. 그리고 모퉁이엔 한 여자가 정수리를 바닥에 대고고개를 뒤로 젖히고 다리를 벌린 채 누워 있다. 배 위엔 투명한 상자가 얹혀져 있다. 또 다른 여인은 원통형 관을 통해 그 상자에다 주기적으로 계란을 뱉어 낸다. 반대편 모퉁이엔 또 한 여자가 모로 누워 있다. 이제 죽음의 엄숙을 걷어차고 삶으로부터의 탈출을 기뻐한 이유를 규명할 차례다.
생명이 자란다. 하늘과 땅이 육신을 먹인다. 우주의 마음이 동심을 선물처럼 거저 준다. 육신이 자란다. 아버지 하늘을 닮아 높고 길게 뻗고 어머니 땅과 통해 크게 돈다. 육신이 자라면서 너와 내가 갈린다. 움튼 동심은 갇히고 닫힌다. 사람은 무리를 지어 위와 아래로 나뉜다. 서로 날을 세우고 미워한다. 여럿이 힘을 모아 아무렇지 않게 하나를 짓밟는다.’나 뿐’인 마음에 모두가 상처를 입는다. 사람은 어느새 도구로 전락한다. 사람마다 보이지 않는 값을 매긴다. 고통스럽고 모욕적이다. 천형보다 가혹하다. 가슴에 쌓여 단단히 뭉친 앙금을 털어내고 두드려 깨보려 하지만 마음의 일이라 아픔만 더한다. 차폐된 채 자란 동심은 힘없이 고개를 숙인다.

그만하면 삶의 부조리를 제대로 파헤쳤다 싶었는데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뿌리로 파 내려가 송두리째 뽑아낼 기세다. 한 층 아래 지하로 내려간다. 기억의 세계다. 깊게 잠겨 감지할 수도 없었던 무의식의 심연까지 수직으로 하강한다. 흉터조차 희미해진 환부의 밑바닥을 헤집고 들어간다. 사람들이 왜 편으로 갈리고 하나를 무참히 짓밟는지 작심하고 따진다. 과거는 입구부터 심상치 않다. 온통 붉은 빛이다. 공중엔 육신의 조각들이 매달려 있다. 피와 살이 튄다. ‘지금’을 떠나 미래로 앞질러 갔을 때보다 과거로 되돌아가는 여정이 훨씬 더 잔혹하고 아프다. DNA처럼 기억도 유전된다고 하니 까칠한 ‘핏빛 탐구’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다.
규율이 넷을 지배한다. 하나는 전체를 위해 존재한다. 사회의 최고 원리는 질서와 효율이다. 신 따위는 없다. 수령만이 하나로 존재한다. 생존의 유일한 수단은 복종이다.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한다. 이탈은 죽음이다. 무릎이 닳도록 꿇어 엎드린다. 굴욕과 희생이 일상이다. 가족과 학교와 직장은 이념의 붉은 줄로 사람을 단단히 옭아맨다. 고막을 찌르는 호각소리로 하루를 열고 닫는다. 전체를 의심하고 하나를 주장하는 이는 무참히 처단한다. 사람들은 한 치의 틀림도 없는 부속품이나 잘 벼린 병기일 때만 가치를 인정받는다. 서로에겐 여우같은 감시자이자 무자비한 집행관이다. 끔찍한 붉은 줄은 핏줄을 따라‘지금’으로 이어지고 공포의 호각소리가 이명처럼 고막을 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