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 관무기

4월2일 키에르스마커 『바이올린 페이즈』, 국립현대미술관 / 4월5일 현대무용단 탐 『비탄』『여기에 서서』, 이화여대 삼성홀 / 4월21일 국립현대무용단 『스윙』,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 4월25일 한국무용제전 윤승혜무용단 『위로』·쿰댄스컴퍼니 최진욱 『공동체』, 아르코 대극장

2018년 4월 2일 월요일
오늘, 중국의 위성 텐궁(天宮) 1호가 떨어졌다. CNN은 미사일운반트럭사진을 보여주며, ‘이 정도 사이즈’라고 말한다. 위성이 남태평양에 떨어졌을 때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너의 이름은』에 나오는 혜성처럼 장관의 우주쇼를 보여주었을까. 지구를 몇 바퀴나 돌다가 빨려 들어온 걸까.
국립현대미술관의 큰 설치작품을 주로 배치하던 곳에, 하얀 모래 다섯 포대를 10×10미터의 면적에 깔아 무대를 만들었다. 관람객은 약 200명. 둘러앉기도 하고 서 있기도 했다. 미술관이 모은 사람일까, 키에르스마커의 명성덕분일까. 키에르스마커는 사각 무대 한 면의 가운데에서 무대 중앙으로 네 걸음을 걸어 들어가 멈춰 섰다. 바이올린 음악이 거칠게 울리기 시작. 댄서는 양 손을 살짝 뻗어 가슴께쯤 들어올려 살살 몸통 운동 하듯 좌우로 휘젓기 시작. 오른쪽 왼쪽, 오른쪽 왼쪽… 점점 빨라진다. 한바퀴 휙~ 돈다. 자전 성공! 계속 돈다. 이제는 억지로 돌리는 게 아니라 회전력으로 회전한다. 점점 거기서 생긴 추진력으로 모래 바닥에 길을 만들며 시계반대방향으로 무대를 크게 원을 그리며 돈다. 공전 성공! 궤도가 생기고 댄서는 스스로 돌며 궤도를 따라 무대를 돈다. 이건 자전과 공전. 돌며 도는 우주의 신비. 도는 걸 언제 그칠까, 다른 뭘 보여 줄 것인가. 다른 건 없다. 이게 전부. 음악도 계속 같은 음을 연주하다가 아주 조금씩 변주할 뿐. 이게 뭐지, 이상한 느낌이 든다. 그러다 알게 된다. 아~ 맞다, 그런 거 였지… 내 인생이 쳇바퀴 돌 듯 하는 게 받아들여진다. 우주도 인생도 원래 그런 거 였다. 담담해지며 미묘한 에너지도 느껴진다. 바이올린은 반복되는 선율을 계속 그어대고, 댄서는 시작부터 끝까지 계속 반복하여 돌며 돈다. 살짝 머물거나, 모래를 차 올리거나, 치마를 들춰올리거나(속옷도 보인다), 잠깐 거꾸로 돌기도 하지만(이것들은 세차운동 같은 거다), 기조는 변하지 않는다. 시종일관 돌며 돈다. 수피의 댄서같은 키에르스마커.
그녀가 무대로 진입하던 지점에 서 있었다. 시작 후 몇 분 지났을까. 스태프 한 명이 회색 점퍼를 들고 다가온다. 이 옷을 걸쳐 주세요 - 에? - 댄서가 돌면서 빨간 옷을 보고 위치를 잡는데요, 헷갈리거든요. 건너편을 보니 빨간모자와 점퍼를 입은 남자가 서있다. 나도 빨간 모자, 붉은 계통의 점퍼, 가방, 운동화! 점퍼를 사양하고 조용히 구석으로 물러났다.
키에르스마커는 무채색 원피스에 납작한 실내화. 매끈한 몸매. 아무 장치 없이, 소박한 치장으로, 바이올린과 흰모래의 도움을 받아 혼자 우주적 진리에 대해 말한다. 심오한 질문에 답한다. 딱, 요만큼만 있어도 대작이 나오는 것을. 마지막은 중심으로 빨려 들어와 폭발할까, 텐궁처럼? 혜성처럼? 그랬다. 중앙에서 입을 쫙 벌리고 폭발했다. 중심으로 떨어졌다. 짧고 매혹적이고 에너지가 응축된, 그래서 허리춤의 반짝이는 단도 같은 작품. 개인적인 고백이 주류를 이루는 현대춤의 경향성에 일침.

2018년 4월5일 목요일
봄비가 왔다. 비는 공연이 끝난 후에도 그치지 않았다. 현대무용단-탐의 『비탄』 과 『여기에 서서』. 30년 전 작품, 옛날 것이라 생각할 필요는 없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당대에는 모두 현재. 모두 현대를 말한 것이고 옛날 것이라 해도 오늘 무대에 오르는 순간 현재의 것이 되는 것. 음악과 구성이 영화 『닥터 지바고』나 『전쟁과 평화』를 연상시킨다. 흡사한 분위기. 두 작품 모두 축축하고, 비장하고, 센티멘탈한 러시아적 서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서곡이 있고 첼로와 독무가 이어지고 관악연주, 노래, 타악연주와 함께 독무, 군무를 흩어 놓았다. 제목에서 보이듯 당시 안무자의 비장한 심정과 함께 그때부터 단단한 내공을 쌓아온 것이 느껴진다. 비장감 속에서도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은 무용수들의, 풋풋함과 젊음이 눈에 띄는 것이다.

2018년 4월8일 일요일
사유종시(事有終始). 시종(始終)이 아니라 종시(終始)라는 점. 끝이 있어야 시작을 상정한다는 것. 부활의 의미가 성탄보다 무겁다는 건 비신자인 나도 아는 것이다. 종파마다 날짜가 다르고 아예 기념하지 않는 곳도 있지만, 오늘은 정교회의 부활절, 아현동의 성 니콜라이 성당에 갔다. 스산한 날씨. 여기는 어느 러시아 시골마을 같은 곳. 직접 만든 과자와 채색한 달걀이 입구 테이블에 가득 하다. 실내는 웅성웅성, 흰연기가 피어오르고 별별 나라의 사람들이 다 모여있다. 하얀 턱수염을 배꼽까지 길게 늘어뜨린 그리스인 사제가 집전을 하고, 사람들을 이끌어 행진을 한다. 소설 「예수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다」에 나오는 그리고리스 사제의 모습 그대로. 저게 러시아어인지 그리스어인지, 전혀 못 알아 듣는 외국어는 즐거운 것이다.
옛날 가야산의 고승에게 불교를 믿는다는 건 뭘 믿는 겁니까 하자, 대답했다. ‘윤회를 믿는 것이다.’ 기독교를 믿는다는 건 뭘 믿는 걸까. ‘부활을 믿는 것’이라 말하면 틀리는 걸까. 그럼 불교신자는 윤회 믿고, 기독교 신자는 부활 믿는가? 진짜? 인간은 심오한 질문을 하고 종교와 예술은 답하는 것이다. 종교는 윤회와 부활을 말하고, 예술은 한바퀴 빙글 돌며 보여주는 또 다른 차원의 신비한 해결책인 것. 혹시 예술가에게 예술은 종교일까. 무대에 올라 춤추는 무용수는 예술을 믿는가. 예술을 믿는다는 건 뭘 믿는 걸까.

2018년 4월21일 토요일
토월극장 입구에서 오랜만에 지인을 만났다. 옛날 전당에 잡다한 공연들을 올릴 때부터 알고 지냈으니 꽤 오래된 사이. 만나자 첫마디가 ‘이것 벌써 매진 됐어요’였다. 그건 소위 업자끼리의 소통방식 같은 건데, 작품의 질, 출연진 등등은 토크주제에서 한참 뒤에 있는 것이다. 잘 팔린 작품은 좋은 것, 안 팔린 공연은 여러 사람에게 폐만 끼친 나쁜 것. 그래서 ‘이거 벌써 매진’이라는 의미는 현대무용의 티켓파워에 대한 작은 놀람을 깔고 있는 것이다. 현대 무용이 자발적으로 표가 팔릴 거라고 누가 생각했을까. 하긴 지금도 시내곳곳에서 벌어지는 현대춤 공연은 거의 자가발전! 하지만 최근 국립현대무용단의 작품들은 ‘매진’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매진의 비밀은 뭘까?
스웨덴에서 온 재즈밴드가 라이브 연주를 했다. 드럼 소리가 거칠고 투박해서 내내 신경이 쓰인다. 한국 재즈팬들은 귀명창이다. 미국의 일류연주자들을 꿰고 있고, 최고의 연주에 익숙하다. 공연의 많은 부분을 밴드에 의존했지만 ‘엄지척’할 수준의 연주는 아니었다. 락이나 재즈에 한국말을 얹어보면 말이 음악에 짝 달라 붙는 맛이 부족할 때가 있다. 겉도는 느낌이 느껴질 때가 있는데, 무대에서도 그런 부분이 보였다. 두드러졌던 곳은 음악이 흥분했을 때였다. 밴드는 관람석이 꽉차고 흥이 오르면, 특히 재즈라는 것은 아무리 약속을 해도 즉흥적인 부분을 무시 할 수 없으니, 커지고 세지고 늘어나는데, 댄스는 약속대로 진행하니 들떠 보이는 거다. 파스타 감아 올리는데 소스가 미끄러지는 것 같은 그런 느낌. 계속 그랬다는 게 아니라 밴드가 즐겁다고 달릴 때, 살짝 그런 부분이 보였다는 것.
그러나 그런 소소한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무대는 즐거웠고 관객들의 반응도 뜨겁다. 연출과 구성은 옛날 청춘물 영화, 뮤지컬을 연상 시킨다. 특히 뮤지컬 『그리스』와 같은 분위기. 관객들을 살펴보며 매진의 비밀을 찾아본다. 문제는 이들이 어디서 온 걸까 하는 것. 아르코의 현대무용팬인가. 아니다. 이들의 반응과 시청태도는 뮤지컬이다. 이들은 바로 뮤지컬 관객! 이들은 『스윙』을 댄스뮤지컬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뮤지컬 요소 중에서도 댄스를 선호하는 관객들의 폭발적 반응을 이끌어 내고 있는 것이다. 매진의 비밀은 이것! 하기야 뮤지컬 배우들이 아무리 춤연습을 한들 현대무용단원들과 비교할까. 그래서 노래와 대사없이 댄스만 가지고 뮤지컬을 만들어도 상당한 시장이 존재 할 것 같다(뭐라고 부르던 간에). 많은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고, 국립현대는 좋은 카드를 쥐고 있는 것.
그럼 혹시 이 관객들이 아르코 현대무용의 관객이 될 수 있을까. 없다. 이들은 추상적인 작품을 선호하지 않는다. 아르코관객이 댄스컬을 즐길 수 있어도 그 반대는 어려울 거란 얘기. 그 연장 선상에서 안성수 감독의 현대무용단은 『스윙』류의 작품을 더 많이 할 것 같은 예감. 매진과 박수의 기억은 오래가니까.

2018년 4월30일 월요일
여러 일이 겹치고 허겁지겁 하는 와중에 봄날은 가고 있다. 이제 곧 장미가 필 것이다. 우연히 집어든 한 잡지에 브레히트의 시가 있다. 『아, 어떻게 우리가 이 작은 장미를 기록할 수 있을 것인가? / 갑자기 검붉은 색깔의 어린 장미가 가까이서 눈에 띠는데? / 아, 우리가 장미를 찾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 우리가 왔을 때, 장미는 거기에 피어 있었다 / 장미가 그곳에 피어 있기 전에는, 아무도 장미를 기대하지 않았다. / 장미가 그곳에 피었을 때는, 아무도 장미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 아, 출발도 한 적 없는 것이, 목적지에 도착했구나. / 하지만 모든 일이 워낙 이렇지 않았던가?』 오월에는 주저 말고 장미를 즐기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