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무기

* 정동극장 정혜진 안무 『궁:장녹수전』(4월 5일~12월 29일 정동극장)
정동극장은 한국 전통공연예술을 문화콘텐츠로 이끈 상징적 공간이다. 무용에 기반을 둔 공연예술이 일회성에 그치는 고비용 저효율 구조가 아닌 부가가치 산업으로 의미를 확대시킨 것이 정동극장의 공과로 인정받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에는 가무악에 바탕을 둔 상설공연에 힘입은 바 크다. 『미소:춘향』의 좋은 성과 이후 『미소:배비장전』, 『가온:세상의 시작』, 『련:다시 피는 꽃』으로 이어진 전통무용극은 국내외 많은 관객을 불러 모으며 호응을 얻었다. 이러한 결과는 매년 공연사업실적이나 고객만족도 결과 등을 통해 공시되었고, 이를 통해 이들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2018년은 『궁: 장녹수전』을 무대에 올리며 기나긴 여정을 시작하였다. 이번 작품은 몇 가지 점에서 이전과 달리한다. 우선 이전 작품의 모티브가 고전소설 등 픽션에 바탕을 두었다면 이번 작품은 장녹수 그리고 연산군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하루에 두 번 공연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2018년 4월 현재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4시 공연으로 한 차례 이루어지는 것도 기존과 다른 형태이다.
그렇다면 왜 장녹수일까? 장녹수는 기생에서 후궁의 자리에 오르며 연산군의 총애를 받은 인물로 연산군의 폭정과 함께 그녀 또한 여러 악행을 저질러 조선에서 손꼽히는 요부(妖婦)로 인식된다. 그렇지만 그들의 생은 극적 요소와 여러 문제적 갈등을 담기에 영화, 드라마 등 여러 장르를 통해 시대를 초월하여 새롭게 각색되는 인물이다. 이는 사실에 근거하면서도 창의적인 상상력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담아낼 흥미로운 모티브가 다분하기에 가능할 것이다.
그런 장녹수를 이번 무용극에 담아낸 것은 보편적이면서도 한국적 정서를 그대로 보여주는 인물이기에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우선은 장녹수가 조선 시대의 인물이지만 팜프파탈이란 어느 사회에서든 존재하는 여성캐릭터이기에 타자들도 인식할 범위를 열 수 있다. 그 인물의 삶 자체가 다채로우니 취사선택할 요소가 많아 극적 요소를 증대할 수 있다. 게다가 장녹수는 실제로도 춤과 글에 재주를 가졌다는 기록이 있기에 자연스럽게 가무극으로 수용될 여지가 있어 주인공으로 필요충분조건이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는 다양한 전통춤들이 삽입된다. 장구춤, 한량춤, 북춤, 사자춤 그리고 선유락을 비롯한 정재까지 부분적 요소를 차용하여 전통춤이 가지는 멋스러움을 보여준다. 아무래도 장구춤 장면은 장녹수의 입문 과정에 대한 설명과 군무를 통해 장구춤이 갖는 매력을 한꺼번에 보여주어 관객에게 호응이 높은 장면이다. 이러한 전통춤은 서사구조에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장면을 극대화하기에 완성도를 높인다.
이 작품의 주요 인물은 장녹수, 연산군, 제안대군 세 사람이다. 이 작품에서 제안대군은 장녹수를 예기로 입문시킨 인물로 묘사된다. 연정이 있었지만 장녹수와 조우한 연산군이 그의 재색(才色)에 빠져들고 그를 취하여 궁으로 가는 것이 도입의 이야기 구조다. 여기서 세 인물의 비중이 비슷하지만 흔히 연극기호학에서 분석한 행위소 모델을 통한 행동의 삼각관계는 그리 뚜렷하지 않다. 이는 장녹수와 연산군을 주체와 대상으로 보고 발신되는 요소가 심리적 면모가 강조되는데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작품에서는 제안대군에 대한 성격이 불분명한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예를 들어 제안대군이 장녹수를 찾아 시국을 알리는 장면도 전개상 필요한 장면이지만 이를 삭제하여도 무방한데 이도 이런 관계성에서 비롯된다.
후반부에서는 여러 극적 요소가 눈길을 끈다. 연산군이 상소문에 휘감기며 광기어린 몸짓을 분출이나 장녹수가 탈을 쓴 이들의 북을 치며 강한 움직임을 보이는 모습은 연산군, 장녹수의 내면 표출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렇게 중요한 핵단위에서 움직임은 이 작품의 전체적인 흐름 상 무난하다. 그럼에도 시퀀스 별로 이야기를 설명하고자하는 대목이 많다보니 분절되는 경우도 눈에 들어온다. 이 작품이 지향하는 바가 스토리텔링도 중요하지만 한국미의 이미지화에 있다면 이야기 구조를 조금 정형화시켜 관객에게 불명료한 요소를 제거해줄 필요가 있다. 이는 앞서 이야기한 타자의 인식이 정동극장에서는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존재함에서 비롯된다. 예를 들어 연산군과 장녹수의 짚인형도 연산군이 지닌 음란성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지만 갑작스런 등장으로 생경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정동극장의 관객은 국내 관객만큼 외국 관광객이 찾는다. 그래서 75분의 짧은 시간 안에 타자에게 얼마큼 쉽게 인식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본질적인 문제도 고민해야 한다. 물론 한국인에게는 이 이야기가 어렴풋하게라도 인식하고 있지만 역사 속 인물에 대한 이해가 없는 관객에게 쉽게 다가갈 구성의 단순화 작업도 필요할 것이다.
이 작품에서 사물팀은 극의 여러 중요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 서두와 뒤풀이는 물론이거니와 극 중에서도 탈을 쓰고 여러 중요 역할을 맡아 남자 무용수를 대신한다. 그렇지만 이들이 여러 역할에 참여하기에 피로도가 높아 보인다. 제반 여건에 맞춘 결과였겠지만 그들의 역할에 더 집중적으로 참여가 필요하다. 이와 함께 앞놀이와 뒤풀이의 내용도 새로움이 요구된다. 앞놀이에서 관객을 무대로 올리고 접시돌리기 하는 것이나 뒤풀이에서 상모를 돌리며 연풍대 하는 모습은 관객에게 큰 호응을 얻을 수 있는 연희지만 이전 작품에서도 나왔던 모습이기에 새로운 흥밋거리 개발이 필요하다.
또한 죽음 이후 흥겨운 풍물놀이가 제대로 설득력을 지닐 수 있을지 고민해 보아야 할 듯하다. 비장한 죽음 이후 나온 흥겨운 뒤풀이는 아이러니적 구조를 떠나 핍진성에서도 떨어진다. 오히려 지전춤이나 여러 굿에서의 전통적 요소를 삽입하여 진혼과 해소의 의미를 전달할 기재가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궁:장녹수전』은 한국문화 원형의 전형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요건을 갖추고 있다. 장녹수라는 팜므파탈과 연산군이라는 폭군의 이야기는 어느 사회나 존재하는 인물로 타자에게도 지평을 열고 있으며 이를 한국 전통에 담아내기에 새로움을 전달해 줄 요소가 충분하다. 이 공연은 장기 상설공연이기에 여러 아쉬운 부분에 대해 여러 의견을 청취하여 부분적 수정을 한다면 또 다른 정동극장에서 기억할 작품으로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