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스크랩북

여기 이 사진은 제작극회 동인들이 1959년 12월 9일 원각사 극장에서 테네시 윌리엄스 원작, 차범석 연출 「유리동물원」 공연을 마치던 날 밤의 기념사진이다. 전혀 연극이란 것을 모르던 나를 ‘대학극회’ 동인으로 만들어준 것은 고려대생 김경옥이다. 왜 그랬던지 그때 내가 연극동인이 됐다는 사실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김경옥을 처음 만난 곳은 명동유치원 자리에 있었던 함귀봉무용연구소이다. 그때 김경옥도 나처럼 ‘대학무용연구생 모집’이란 신문 광고를 보고 그곳으로 왔었다고 하였다.
춤과 대학생을 관련지어 생각케 한 그 신문 광고 문구(文句)에서 우리는 새 세상의 메시지 같은 것을 느꼈던 것인지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연구소로 고려대·연세대의 문과대생인 김경옥, 최창봉, 차범석 등이 와서 현대무용을 배웠을 리가 없었다. 어쨌든 나는 무용연구소에서 이들 문과대생들과 어울리면서 연극에 대한 관심이 전과 같지 않게 되었다. 이런 인연으로 훗날 한국 현대극을 선도해야 한다고 나선 제작극회 창립 동인으로까지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바람직한 연극 동인으로서 지녀야 할 아무런 능력도 갖고 있지 못하여 한 번도 연극 중심엔 들지 못하고 늘 주변에서 돌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들이 나를 자기들 편에 붙여주었다는 고마움 때문에 나는 공연이 시작되면 열심히 시키는 일을 도왔다.
예컨대 풀통을 들고 벽보 붙이는 일에서부터 컵, 주전자와 같은 소도구를 빌려오는 일, 여성 동인들을 모시고 구제품 시장에 가서 의상을 골라 들고 오는 일, 객석에 앉아 박수에 가세하는 일에서부터 공연장으로 빌린 강당이나 회의장을 청소하고 장치를 세우고 밖에서 지켜 서서 손님을 맞는 일까지 근육으로 하는 머슴의 일 모두 그렇게도 신날 수 없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처럼. 나야말로 친구 따라 내 공부 약학이 아닌 길에서 서성거렸지만, 제작극회 동인이었던 것을 한 번도 후회해본 적은 없었다.

- 예술가의 「이야기가 있는 방」(한국문화예술진흥훤), 2004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