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스크랩북

정리된 생각은 아니지만 진정한 친구는 개구쟁이 때 어깨동무 정도일까. 성장한 후의 친구란 결국 인생의 경쟁대상자처럼 돼버려 숭고한 뜻의 그런 우정적(友情的) 친구는 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심금을 울리고 우리를 행복하게 해준 미담(美談)의 친구도 실제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꼭 친구라는 이름 때문이 아니고 적군(敵軍)이나 흉악범한테도 있을 수 있는 그런 인간애(人間愛)라고 보면 친구를 경쟁대상자로 규정지었다고 해서 아주 틀린 것은 아니지 않을까.
어떻든 현실적 세상사(世上事)는 친구이기 때문에 양보하는 경우보다 친구에 뒤지지 않기 위해 대결을 해야 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은 것 같다.
가령 직장에서의 승진(昇進)이나 사랑의 경합일 때 친우(親友)기 때문에 내편에서 물러서야 하는가. 만일 매사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 친구의 도리라면 진정 친구의 의미는 힘겨운 멍에에 불관한 것이 아니겠는가―그렇게 생각된다.
해방 직후 그 혼란 속에서도 어떤 부류의 젊은이들은 지고(至高)의 사랑이니 플라토닉 러브니 하는 순정적 주제 속에 중요한 세월을 허송하기도 하였다.
나의 가까운 주변엔 한 여인을 놓고 가까운 친구끼리 서로 적(敵)이 되고, 그것으로 해서 남북으로 갈라서는 정말 상상하기 힘든 일이 실제 있었다.
그들은 동향(同鄕)친구고 같이 월남한 동지(同志)며 같은 대학생이었다. 좌우익(左右翼)이 갈라져 싸우던 당시 ‘동지’라는 호칭은 죽음과도 연결될 수 있는, 어떻든 그들은 그런 동지였는데―이들 사이에 시를 쓴다는 한 문학소녀가 등장하면서 서서히 사랑의 대결이 시작되어 틈이 생기게 되었다.
우리는 처음부터 이들, 지고의 선(至高善)을 추구하는 이들―을 말릴 생각은 없었다. 그저 그 결말을 지켜볼 뿐이었다.
차라리 결투라도 할 수 있었으면 이들은 그렇게 외롭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같은 요(褥), 같은 방에서 침묵하고 살아야 하는 숨 막히는 이들의 생활에 누군들 동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끝내는 그중 한 친구가 이 세상에선 세 사람이 같이 살아갈 길은 없다고 생각하고 다시 북쪽 고향으로 떠나가 버렸다. 들리는 말에는 그는 여인에게 북쪽으로 오라는 쪽지를 남겼다느니 이미 결판이 나 있었으니 그랬을 거라느니들 이야기도 분분했었지만 정작 38선을 다시 넘어 되돌아갈 정도 심각했었다는 그 사실이 우리에게는 더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6·25 전쟁 때 북으로 갔던 그 친구가 인민군 장교가 되어 서울로 왔더라는 것이다. 와서 그 여인을 찾고 있었다고 했다.
이 사실을 전하는 친구의 말에 의하면 “그놈은 제 친구 이야기는 묻지는 않고 그저 체네(처녀·그 여인)의 일만 묻는 거야. 그 둘이 결혼했다는 말은 차마 못해줬어. 그놈이 무섭기도 하고 말이야….”
사실 이때 그들이 만났더라면 어떻게 됐을까―하는 가정은 오랫동안 우리들의 화제거리였다. 아직도 나는 만일 그들이 그때 만났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하는 것을 생각해볼 때가 있다.
친구라는 것. 나보다 출세하고 잘 살면 애써 잊으려 하는 패배(敗北) 콤플렉스가 있는 반면, 나보다 불행해지고 난처에 처해졌을 때에는 동정과 도움의 손길을 아낌없이 보내는 사이, 그런 이웃이 아닐까.
북에서 온 인민군 친구는 그때 권총을 가진 강한 입장이지만 이미 사랑에서는 진(敗)자였으니까 그들이 서로 만났더라면 어떻게 하려고 했을까. 아직도 우리는 종결짓지 못하는 우정 드라마로 남겨두고 있다.
그러나 이미 승부나 경쟁이 필요 없게 된 지금의 내 나이에서는 오늘의 친구보다 옛날 그 어깨동무의 순정에 더 향수를 갖게 되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다.
어릴 때, 친구 없이 지내는 하루란 그리도 길고 지루할 수가 없었다.
나의 같은 반 친구가 다른 고장으로 이사 갔을 때 나는 슬픈 일기(日記)를 쓰면서 하염없이 울었던 일을 기억한다. 그때의 슬픔은 내 정서 속에 그대로 스며있다.
노후(老後) 우리 어머니의 가장 큰 고통은 고독이셨다.
전화를 돌리는 방법마저도 잊게 되는 그런 나이에 이르러서는 어머니는 모든 친구의 음성에서마저도 이별해야 했다. 그때의 어머니의 모습은 다섯 살밖에 안 되는 혼자 있는 어린애처럼 외롭게 보였다.
같은 또래의 동무가 있었으면 짝지어주고 싶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내 그 외로움까지도 의식하지 못하시는 황홀하고 조용한 젖먹이 어린애처럼 되어갔다. 그는 친구 없이도 살 수 있는 그런 멋진 분으로 되어갔다.

- 샘터, 1984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