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스크랩북

자목련(紫木蓮) 꽃잎이 추하게 바랜 것을 보니 이봄도 벌써 다 가버렸다.
마당의 모란꽃망울은 하루가 다르게 부푸는데 작약은 이제야 겨우 붉은 순을 내민다. 작약을 옮겨 심은 지 4년 된 작년까지도 꽃을 보지 못했다. 화원사람의 말은 심은 자리가 그림자 져서 그렇다나―그러나 원래 좁은 마당, 이것만을 위해 따로 옮길 자리가 없으니 금년도 잎새만 구경하고 말지 하는 생각이다.
첫비 내린 다음날, 마당 구석구석의 겨울 낙엽들을 손으로 긁어모았다. 나도 이젠 많이 늙었나 보다. 할아버지가 즐기시던 이런 봄 일이 싫지 않게 된 것을 보니―종일 이런 생각을 하면서 봄맞이 일을 했었다.
이 봄 마당의 청매(靑梅), 홍매(紅梅) 두 그루가 꽃 하나 피우지 않고 잎새만 돋아나 그만 봄을 망쳤다. 그러나 무릇 순과 돌부채 흰꽃으로 해서 뜰 구경 온 친구들 앞에 간신히 체면을 세웠다.
3년 전 여름, 강원도 살둔이란 곳으로 갔다가 그곳 냇가에서 캐온 달뿌리 풀이 지난여름 네댓발 되는 포도경(葡萄莖)을 뻗어 장관을 이루었는데 이 봄, 그 줄기 마디마디에서 새순이 돋아나 이대로면 필경 이 좁은 뜰은 달뿌리 줄기로 얽혀져버리고 말 것 같다. 정말 그렇게 되는가 두고 볼 생각이다.
한 뿌리 얻어 심은 산죽이 이제는 작은 숲을 이루어 제법 볼만하다. 그런데 집수리하러 온 사람 중에 정색을 하고 산죽은 집 곁에 심으면 안 된다는 시골 청년이 있었다. 산죽뿌리가 집 안 구들장을 뚫고 방 속으로 밀고 올라온다는 것이었다.
물론 시골집은 그럴 수 있겠지. 그러니까 그런 이야기도 생겼을 것이다. 그러나 세멘트로 깊이 기초를 하는 도시의 집이면 그런 염려는 없다―는 내 말. 그도 그것을 긍정하면서도―그래도 산죽은 집 곁에 심으면 안 된다는 신앙과 같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풍속이란 이렇게 고집스러우면서도 사랑스러운 것.
이제 이 청년이 성공하여 서울에 큰 집을 짓고, 멋진 정원을 꾸민다고 하더라도 벌레가 없고 사철 푸르른 도시에 알맞은 식물인 산죽은 끝내 심지 않을 테지.
담장 위로 붉은 감이 주렁주렁 달리는 집을 볼 때마다 나도 마당에 감나무를 심어야지 하고 봄마다 벼르면서도 아직 나는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아직 나는 감나무에 대한 애정이 절실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북쪽 내 고향에는 감나무라는 것이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사실 그 나무의 정서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는 나무 한 그루 옮겨 심는 일이 몇 년씩 미뤄질 리가 없지 않는가.
고향집 장독대 곁에 있던 앵두나무들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저절로 돋아난 앵두나무들을 하나도 뽑아버리지 못하고 이쪽저쪽 옮겨 심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 나무들이 자라서 열매 맺는 것도 있고….
이렇게 달뿌리나 산죽이나 감나무 또는 앵두나무 같은 것 모두가 사람들이 각기 살아온 관습에 따라 가까이 하던지 멀리 하던지 하는 것이지 그 나무가 꼭 특출해서 뜰에 심는 법은 없을 것 같다.
어떻든 또 여름을 맞고 봄을 보낸다. 어느 계절이든 가는 것은―아쉽고 오는 것의 반가움은 어려서나 늙어버린 오늘이나 간에 조금도 다르지 않다. 말하자면 계절들이 나에게 익숙한 것이기 때문일 것일까.
익숙함. 나는 젊을 때 일상적인 반복이나 그런 익숙함에 권태를 느끼고 허무감까지를 연결시켰던 때가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자고 먹고, 또 자고 먹고―태어나고 죽고―하는 것이.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익숙하다는 것의 행복을 터득하게 되었다. 반복되는 현상의 다행함을 알게 된 것이다.
사랑하는 얼굴은 또 보고―다시 보고. 먹고 싶은 음식은 또 먹고―다시 먹을 수 있다는 반복은 얼마나 행복한 신의 혜택인가 하는 것.
만일 되풀이 되는 여름이 아니고 처음이고 단 한 번밖에 당하지 못하는 여름이었다고 가정하면 그 익숙하지 못함이 얼마나 우리에게 불안을 줬을까. 새롭고 신기하다는 것은 확실히 행복은 아니다. 또 만나는 여름이 그래서 즐겁고, 보내는 봄이 내년을 기약하기 때문에 기다려지는 것이 아닌가.

- 동서문화(東西文化), 1985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