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살롱

대한항공이 오너 갑질로 홍역을 치르고 있지만, 국내 재벌 오너들이 다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종업원을 존중하는 오너 경영자도 적잖다. 국내 3위 규모 SK의 최태원 회장은 계열사 사장이나 임원들과 토론식 회의를 즐기는 거로 소문났다. 농담이 오가는 분위기에 경영 사안을 놓고 이견이 있으면 논쟁도 벌어진다. 지금 사회적 공분을 사고 있는 기업 같았으면 물컵이 날아가고 서류 판 내동댕이치는 사태가 벌어졌을지 모른다.
오너 2세에서 3,4세 체제로 넘어가는 기업이 늘고 있지만, 다들 오너 일가의 30, 40대 젊은 후계자들을 왕자·공주 모시듯 하는 건 아니다. 한 대기업 그룹은 오너 자제가 입사하면 말단직원부터 궂은 업무를 겪게 한다. 고위간부들은 “요즘 일 할만 하니?” 하고 보통 직원들 대하듯 한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오너가 자식에게 “직장 선배들 깍듯이 모시라”고 단단히 훈계했기에 이런 기업문화가 자리 잡았을 것이다.
중견기업에서 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자녀에게 회사를 아예 물려주지 않겠다는 곳도 적잖다. 유한양행이 1960년대 일찍이 선례를 남긴 이후 비근하게는 풀무원·KSS해운 등이 전문경영인 체제를 공표했다. 물론 전문경영인 체제가 오너경영보다 낫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나라마다 신토불이(身土不二)의 기업지배구조가 바람직할 것이다. 하지만 선진기업의 2세 승계에는 뚜렷한 특징이 있다. 오너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경영권을 물려받는 일은 드물고 도덕성과 경영능력을 검증받아야 한다. 이런 대목에 이르면 단골로 거론되는 해외사례가 있다. 스웨덴 발렌베리 가문이다, 자동차·방위산업·가전·통신장비 등 유수의 글로벌 기업 19개를 소유한 이 나라 최대 그룹은 무려 5대째 친족 경영권 승계를 해 왔지만 우리처럼 ‘문어발식 가족 경영’이라고 비판하는 목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사회공헌에 열심인 점도 작용했겠지만, 무엇보다 지배구조가 공정하고 투명하다. 대학 학비를 스스로 벌고 세계적 금융중심지 등 격전장에서 실무경험과 실적을 쌓아야 후계자 군에 들 수 있다. 금수저라도 눈물 젖은 밥 먹어보지 않고선 덤비지 말라는 뜻이다.
독일 머크, 일본 도요타, 대만 테코 같은 회사도 가족 승계의 모범사례다. 도요타는 오너가와 전문경영인 집단이 번갈아 최고경영자를 맡는 독특한 지배구조를 살려 세계 최대 자동차그룹의 위상을 이어간다. 기업지배구조는 이처럼 그 나라, 그 기업에 맞는 비즈니스 생태계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데 국내 크고 작은 기업들이 이따금 연출하는 오너 리스크 파동은 비판 여론과 정부 규제의 역풍을 자초한다. 재벌 적폐청산을 별러온 정부 당국은 벌써 상법개정안이라는 재벌개혁 카드를 다시 꺼내 들었다. 집중투표제 의무화, 다중대표소송 도입, 감사위원 분리선출 등이 주 내용이다. 대주주 전횡을 막는 순기능에 비해 투기자본의 공격으로 기업경영이 위축되는 역기능이 우려되는 규제방안들이다. 잘못된 기업 관행은 마땅히 바로잡아야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과도한 사회적 비용을 치른다면 수지타산 맞지 않는 개혁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