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27일 인쇄
2018년 7월 1일 발행
발행·편집인 / 趙楡顯
등록/1976년 1월 27일·라 2006호
2018년 7월호 통권 509호 |2025년 4월 9일 수요일|
 

춤 스크랩북

 

새로운 變形隊列(변형대열)
- 宋范 新作舞踊發表會를 보고




趙 東 華()

지난 4月 ‘코리아 바레이團’ 을 이끌고 公演(공연)을 가진 宋范(송범)氏는 이번 17,8日 兩日(양일) 다시 市公館(시공관)에서 新作舞踊發表會(신작무용발표회)를 가졌다. 宋范氏의 韓國舞踊(한국무용)의 位置(위치)에 對(대)하여 여기서 새삼 말할 必要(필요)는 없겠지만 解放(해방)以後(이후) 6·25까지 所謂(소위) 旣成(기성)舞踊家(무용가)들이 휘졌는 混濁(혼탁)과 無秩序(무질서)속에서 꾸준히 그 志向(지향)하는 ‘모더니즘’ 을 爲(위)해 技術(기술)을 習得(습득)하고… 그 完璧性(완벽성)으로 事變(사변)과 避難中(피난중)의 舞踊空白期(무용공백기)를 單身(단신)으로 지켜온 功勞(공로)의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客觀的(객관적)優位(우위)한 處地(처지)며 또 現代舞踊(현대무용)이라는 看板(간판)을 혼자 獨占(독점)하고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育成(육성)할 方法論(방법론)을 發見(발견)하지 못하고 陣痛(진통)하고 있었다. 그 例(예)로서 初期(초기)의 <出陣(출진)> 以來(이래) 이렇다할 作品하나 내지 못한채 數次(수차)의 公演(공연)을 <만네리즘>의 空轉(공전)으로 그쳤던 것等(등)이다. 헌데 이번 新作發表會는 이제까지의 제자리걸음에서 確實(확실)히 어떤 端緖(단서)를 얻어 그쪽으로 옮겨간 자죽이 나타나고 있어 기쁜일이다. 作品 <生存競爭(생존경쟁)>이 바로 그것이다. 單純化(단순화)시킨 白鳥(백조)의 簡依(간의)로서 나오는 이 群舞(군무)는 빠른 ‘템포’ 를 要求(요구)하는 現代(현대)生理(생리)에 알맞은 動的(동적)인 構成(구성)으로 ‘아렌지’ 되었을뿐만 아니라 새로움, 새로움의 變形隊列(변형대열)의 構圖(구도)로서 主張(주장)하는 이 舞踊(무용)은 속속들이 觀客(관객)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주 理念(이념)이 先行(선행)하는 現代舞踊(현대무용)에서 이처럼 透明(투명)한 作品을 만드는 일은 決(결)코 容易(용이)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좋은作品 몇을 보면 유다가 十字架(십자가)앞에서 뉘우치는 이야기의 <懺悔(참회)>가 考證(고증)이 좀 不確實(불확실)한 것 같았다. 말하자면 예수를 판 돈도 쓰지 못하고 自殺(자살)한 그 直前(직전)의 懺悔의 유다가 暫時(잠시)나마 마리아的(적)인 조용함으로 合掌(합장)해질 수 있을가 하는것, 또 作品의 (효과)로서는 오히려 예수는 人間(인간)의 苦痛(고통)을 벗은 喜悅(희열)의 存在(존재)로서 取扱(취급)하였더면 그 場面(장면)이 그처럼 어둡지는 않았을 것이다. <壁(벽)>의 會話性(회화성)은 알고남음이 있고 마지막 한손으로 얼굴가리고 觀衆(관중)을 손가락질하며 앞으로 걸어나오는 것 - 모두 含蓄性(함축성)있는 詩(시)였는데 標題(표제)의 <壁(벽)>의 裝置(장치)가 누구네집 무디진 담벼락 같은데는 若干(약간)失望(실망)하였다. 人生(인생)의 앞길에 가로놓인 障壁(장벽)을 말하는 것이면 좀더 象徵性(상징성)있는 裝置(장치)가 아니면 안될 것이다.
<工場地帶(공장지대)>는 ‘테에마’ 가 낡은것이어서 까슈인의 音樂(음악)<巴里(파리)의 아메리카人>을 붙였으나 새롭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熱演(열연)의 李月影(이월영)氏(씨)는 좋게 自己個性(자기개성)을 살렸고 金奈美(김나미)孃(양)도 自己役(자기역)에 忠實(충실)하였다. 다음 發表會(발표회)에 對(대)해 期待(기대)가 크다.

─ (筆者 舞踊評論家) 朝鮮日報 1955년9월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