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무기

초등학교 앞을 지나고 있었다. 현관에 큰 간판이 걸려있고 구호가 적혀 있다. “성실하고 창의적이며 동적인 인재 육성” 는 나무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혼자 ‘충’자를 집어넣고 재미있어 했다. 허나 학교 모토에 그럴 리 없는 것. 목을 빼서 다시 돌아보았다. ‘충’이 아닌 ‘능’. 나는 오독하고 혼자 즐거워한 것이다. 능동과 충동이 뭐가 다를 것인가. 태도가 선량하고 결과가 좋으면 능동, 태도가 불량하고 결과가 나쁘면 충동일까. 내가 오독을 일삼는 것은 ‘성실하고 창의적이며 능동적인 인재’라는 과업을 완수하지 못하고 충동적인 인간이 된 탓일까. 6년 동안 저 구호 아래 공부하면 자기도 모르게 저렇게 되는 걸까 아니면 구호 아래서 지속적인 스트레스를 받는 걸까. 저런 구호를 크게 붙여 놓는 건 시대착오.
지난여름 도쿄(東京)에 잠깐 머물렀다. 어둑어둑해진 저녁, 밥 한 그릇 찾아먹고 산책을 했다.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는데 한쪽 길가에 포스터가 붙어있다. 그 가운데 춤추는 사진이 보였다. 걷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가까이 가지도 않고 슬쩍 스캔해 보았다. 사람과 비에 가려져 잘 안보인다. 목을 돌려 한 번 더 째려보았다. 춤추는 사진 위아래로 글자들 “゠ナ  創造プロジェ” “ピナ” 등이 보인다. 저건 뭐지. 니나? 피나? 창조? 프로? 이리저리 접합해본다. 갈피가 안 잡힌다. 걷던 길이 끝나간다. 되돌아가는 귀찮음과 뭔 소린지 궁금한 호기심이 격돌했다. 마지막 한걸음에 호기심 승리. 뒤돌아섰다.(사실 싸움의 결과는 이미 분명한 거였다. 나는 충동적이다) 오독은 오해를 일으키니 조금 성실할 필요가 있다. 물론 성실한 건 조금 귀찮은 거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포스터에는 이렇게 써있다.

프랑스에서 호평 7년. 니나 디프라와 함께 하는 창조프로젝트
사후 10년. 피나 바우쉬에게 바친다. 워크숍와 프레젠테이션
공개 프레젠테이션 입장무료

아, 여기서 피나를 만나네. 폐암 판정 받고 4일 만에 죽었다는 피나. 수줍고 말이 없었다는 피나. 골초 피나. 죽은 지 벌써 10년이 되었다. 한때 피나는 대유행이었다. 누구나 부퍼탈을 얘기하고 누구나 탄츠테아터를 얘기하고 누구는 브레히트까지 얘기했다. 구호를 외는 것과 실제는 다른 것. 말은 많았으나 과연 피나의 융합, 개혁, 창조, 자율 정신을 수용하고 소화해내고 극복해서 충분한 자양분으로 삼고 있는지는 의문. 피나 10주기를 맞이해서 어디에선가 관련행사가 있었을까. 그저 한때의 유행이었나.
영화감독 빔 벤더스를 떠 올리건 치바(千葉)에서 모노레일을 봤을 때였다. 이미 며칠 전 피나 10주기 포스터를 보고는 피나의 추억을 찾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치바의 모노레일이 질주할 때 영화 「피나」 속 모노레일이 떠올랐고 빔 벤더스가 떠오른 것이다. 지역 연고팀인 롯데마린스의 마스코트로 예쁘게 치장한 치바의 모노레일을 타고 치바공원으로 갔다. 이곳은 재래종 연꽃으로 유명한 곳. 한적했다. 벤치에 앉아 도시락을 먹었다. 장관으로 핀 연꽃밭 너머로 기차가 매달려 천천히 흘러가는 것을 멍하게 보았다. 세상은 조용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모노레일들은 모두 레일이 바닥에 있는 것이지만 부퍼탈과 치바에 있는 것은 현수식. 즉 레일을 구조물 위에 설치하고 기차가 매달려 운행 되는 것. 게다가 시내 중심부의 강 위를 주로 다닌다는 점에서 같은 것이다.
부퍼탈의 모노레일은 무려 118년 전인 1901년에 생긴 것. 모노레일을 소개하는 영상에는 처음 탑승했던 당시 독일 빌헬름 2세의 모습과 위엄있는 객실내부를 볼 수 있어 흥미로운 것이다. 게다가 1950년대쯤에는 서커스를 홍보하기 위해 코끼리를 태우기도 했는데 객차가 흔들리자 놀란 코끼리가 발광을 해서 객차 밖으로 떨어지는 일도 있었다는 것. 기중기를 동원해 주워올리는 사진도 남아있다. 코끼리는 멀쩡했다고.
모노레일 얘기를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졸링겐에서 태어나 에센에서 공부하고 부퍼탈에서 춤을 춘 피나에게 하늘을 달리는 모노레일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것(세 도시는 붙어있다). 수백 톤의 거대한 기찻길이 하늘에 놓일 수도 있다는 것. 거꾸로 매달려 기차가 달리기도 한다는 것. 저 기차에 코끼리를 태울 수도 있다는 것. 코끼리가 문을 박차고 강물로 첨벙 뛰어들기도 한다는 것. 이 모두는 피나에게 영감이었을 것이다. 무대 위를 물바다를 만들거나 산처럼 꽃을 쌓거나 하는 것들이 기차는 땅위를 달리는 것이고 꽃은 흙밭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되는 사람에겐 전복적이겠으나 모노레일에서 영감을 얻은 피나에게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을 거다.
피나의 작업이 하늘 위에 기찻길을 놓거나 코끼리를 싣고 다니는 것 보다 전복(顚覆)적일 건 없지 않은가. 어쨌든 부퍼탈의 기차는 피나에게 역전(逆轉)의 영감을 주지 않았을까 하는 것. 부퍼탈에 있는 피나가 창조의 고향(kreative Heimat)이라고 불렀던 집무실은 모노레일이 눈앞으로 지나가고 창문을 열어놓으면 덜컹거리는 소리에 대화가 안 들릴 정도의 장소. 그래서 우리가 피나의 작품에서 이런 영감을 알아채지 못했다면 오독이다. 피나와 관련된 별별 어려운 얘기들을 볼 때가 있는데 가끔 핵심이 빠져있다는 느낌. 그건 오독 때문이다.
빔 벤더스는 여러 영화가 성공했고 유명해졌다. 물론 무용 팬들에겐 「피나」, 음악팬들에겐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 예술영화팬들은 「베를린 천사의 시」가 맘에 들것이다. 그러나 내게 가장 인상적으로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힌 그의 영화는 고등학교 시절 본 「파리 텍사스」다. 나스타샤 킨스키의 휑한 눈빛과 눈물, 사막과 드라이브에 깔린 이젠 기억나지 않는 기타연주곡은 심장을 훑어 내리는 것이었고, 사랑과 인생이 본질적으로 저 사막처럼 황량한 것이 아닐까하는 예감을 느끼기도 했었다.(그 이후로는 한 번도 보지 않았다) 그건 오독이었을까.
코엑스에서 3D로 「피나」를 봤으나 입체감이 살아났다기 보다는 시야만 더 좁아지고 매우 보기 힘들었던 기억만 있다. 성공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것도 혹시 오독이었을까.
포스터에 등장한 니나 디프라(Nina Dipla)는 그리스 태생의 무용가. 폴크방 호크슐레를 나와 폴크방 탄츠스투디오에서 춤췄고 부퍼탈에서도 일했고 지금은 파리에 살며 컨템포러리 댄스를 가르치며 여러 나라에서 공연한다고. 폴크방과 피나에게서 영향을 받은 방식으로 가르친다 한다. 그러나 이젠 도쿄까지 날아와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피나에게 바치는 춤을 춘다니. 글쎄, 피나를 오독한 것은 아닐까.
서울 시내의 한 미술관에서는 피나와 함께 했던 무대디자이너(페터 팝스트)의 전시회가 열렸다. 무대 위에서 조명, 음악, 댄서들과 함께 있던 무대를 별도로 보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겠다. 단지 무대에 피나가 나온다 해도 한정된 관객일텐데 무대디자인 장기 전시라니, 재정적으로 성공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걱정 되는 곳은 한 곳 더 있다. 다름 아닌 부퍼탈. 부퍼탈무용단과 독일에 피나 10주기 행사가 없을까하고 빌트, 벨트, 파츠(faz) 등의 독일 신문들을 뒤적거렸다. 이런, 부퍼탈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여러 기사를 간략하면, 부퍼탈은 2009년 피나 사후, 수년 동안 세계 각국의 초청을 받고 피나의 작품으로 예술감독없이 무용수를 중심으로한 세계투어를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것. 하지만 더 이상 새로운 작품없이 계속 피나의 작품만을 할 수는 없다는 점, 즉 피나의 옛 작품이 영원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지고 결단의 순간이 왔다는 것. 마침내 2016년, 부퍼탈이 투어를 줄인다는 보도가 나왔고, 2017년 6월, 베를린 도이치 오퍼 와 코미쉬 오퍼에서 5년 동안 무용단을 이끌었던 49세 아돌페 빈더를 새로운 예술감독으로 영입했고, 신임 예술감독 빈더는 17/18 시즌에 신작 두 작품을 초연 할 거라고 발표. 그러나 이후 무용단의 여러 문제에 대해 경영진과 예술감독 사이에 강한 의견충돌. 2018년 취임 일년 만에 이사회결의로 강제 해임. 빈더는 뒤셀도르프 노동법원에 부당 해고에 대한 제소. 부퍼탈은 2018년11월 새로운 매니저로 뮌헨의 바이에리쉬 슈타트 발레에서 오래 일해온 베티나 바그너 베르겔트를 선임했다고 발표. 2019년 8월, 법원은 일단 해고를 인정하지 않고 중재하라고 권고. 2019년 말에 빈더의 고용 계속 여부 등의 판단을 하겠다는 것.
부퍼탈의 빈더에 대한 해고를 불인정하는 판결이 나왔고, 그사이 또 다른 새로운 예술감독이 부임했으니 현재 부퍼탈에는 예술감독이 두 명! 그러나 쇼는 계속 되는 것. 내년 6월까지 미국 투어를 비롯해서 월1회 정도 투어 일정이 나와있다. 모두 피나의 작품. 관객들이 부퍼탈에서 보고 싶어 하는 것이고, 가장 잘하는 것 일 테고, 높은 개런티를 보장 할 수 있는 것들일 거다. 그러나 언제까지? 부퍼탈은 투어 요청이 있는 한 피나의 작품을 계속 리바이벌 할 것인가. 과연 그것이 피나가 원하는 걸까, 그건 오독이 아닐까.
몇 가지 사실을 첨부한다. 피나의 작품은 부퍼탈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 피나의 아들 것이고 그가 세운 피나재단이 독점적으로 저작권 행사한다는 것. 전 세계 어떤 무용단도 부퍼탈과 관계없이 피나의 작품을 공연할 수 있다는 것. 부퍼탈은 꼬박꼬박 작품사용료를 이 재단에 지불 한다는 것. 이건 오독이 아니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