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향시향

전남 담양에 잠시 다녀왔습니다. 그곳에 김규성 시인이 운영하는 문학창작촌 ‘글을 낳는 집’과 그의 부인 김선숙 여사께서 운영하는 ‘세설원(洗舌園: 혀를 씻는 집)’이 있는데, 김규성 시인과 이태관 시인을 만나러 1박 2일 일정으로 다녀왔습니다.
그 집 마당에는 백여 개쯤 되는 발효 항아리가 모여 있는데, 무엇보다 제 눈을 사로잡은 것은 항아리 사이사이로 피어 고개를 들고 있는 흰 백합들이었습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길가마다 붉은 백일홍 나무가 지천인 동네에 왔는데, 그 사이로 핀 흰 백합이라니!
이렇게 제 눈에 닿았으니, 이렇게 또 저와 인연이 닿았으니, 아무래도 이번에는 백합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요.
백합은 어떤 꽃일까요? 답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정일근 시인의 시 「패밀리」를 읽어보는 게 좋겠습니다.

향기롭고 우아한 백합에게는 냄새가 고약하고 키가 작은 마늘, 양파가 패밀리다. 사람 같으면 창피해서 부정하거나 외면해버리지만 자연의 패밀리는 한번 패밀리는 영원한 패밀리다. 남극의 펭귄 부모는 영하 50도의 혹한 속에서 새끼를 살리기 위해 제 몸 아낌없이 먹이로 내주고 까마귀는 자신을 낳아 기른 어미 까마귀가 늙으면 먹이를 물어다주며 봉양한다.

자연의 패밀리가 볼 땐 지구에 살고 있는 패밀리 중에서 부모가 자식을 쓰레기처럼 내다버리고 자식이 부모를 동네북처럼 두들겨 패는 패밀리는, 패밀리끼리 싸우고 고소 고발하고 총질하며 전쟁을 하는 패밀리는, 이름도 고상한 호모 싸피엔스,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그 패밀리뿐이다. 문자를 가지고 시를 가지고 있다는.
― 정일근, 「패밀리」 부분

정일근 시인의 「패밀리」는 전체를 인용하기에는 부담될 만큼 긴 시인데요, 정작 시인이 이 시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인간들아 반성 좀 해라” 이 말 한마디면 충분할 텐데요. 오늘은 그저 “향기롭고 우아한 백합에게는 냄새가 고약하고 키가 작은 마늘, 양파가 패밀리다”라는 한 문장만 기억하시면 될 듯합니다. 그러니까, 백합과 마늘과 양파가 같은 패밀리라는 얘기지요. 동식물을 분류할 때 쓰는 과(科)를 영어로는 패밀리(family)라고 하지요. 백합과 마늘과 양파는 그러니까 같은 과에 속하는 식물이라는 얘기입니다.
이쯤에서 장옥관 시인의 시를 한 편 더 읽어보는 게 좋겠습니다.

마늘장아찌 담그려는지 간장 달이는 냄새
온 집에 진동한다
제 아무리 성질 사나운 말처럼 날뛰던 마늘도 간장 끼얹으면 잠잠해지니 신기한 일이다
지난 새벽 물 먹으러 나왔다가 본
씽크대 위 통마늘
신생의 기운이라곤 눈 닦고 찾아봐도 없는 겨울 막바지, 밭에서 갓 뽑은 듯 푸릇한 햇마늘
마늘통에 코 갖다 대니
마늘이기 전에 풀이었다는 듯
풋풋한 풀냄새
보늬 쓴 신부처럼 희디흰 살결이다
화장대 앞에 앉은 삼십대 아내의 히프처럼 둥글넓적 퍼진 둔부의 곡선, 보일 듯 말 듯 묻은
수줍은 선홍빛이 에로틱하다
백합과 외떡잎식물 구근에서 백합꽃을 읽어내는 사람이야 드물겠지만 위벽 훑는 비늘줄기의 사나운 미각이란 고삐 없이 날뛰는
내 속의 자연,
끓인 간장 단지 속 들여다보니 갓 서른에 혼자된 어머니가 끼고 있던 백동 가락지
월력 음 이월의 그믐달에 들어 있다
― 장옥관, 「마늘」 전문

이제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백합과 외떡잎식물 구근에서 백합꽃을 읽어내는” 드문 사람 중 한 사람이 되는 것이겠지요. 백합에서 마늘을 읽어내는 시인이나, 마늘에서 백합을 읽어내는 시인이나, 암튼 시인이란 참 희귀한 족속들임에는 틀림없지요.
백합의 이름을 영어로는 ‘릴리(Lily)’, 한자로는 ‘백합(百合)’ 그리고 순우리말로는 ‘나리’라고 하지요.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백합의 영어 어원을 찾아보니 이렇게 나옵니다. “속명의 Lilium은 라틴어 ‘li(희다)’과 ‘lium(꽃)’의 합성어로 유럽에서 알려진 순백색의 ‘Madona Lily’에서 붙여짐.”
그러니까 백합의 영어 이름 ‘릴리(Lily)’는 글자 그대로 ‘흰 꽃’을 뜻하고, 유럽에서 흰 백합은 ‘순결’을 상징하기도 하지요. 프랑스의 브르봉 왕가를 비롯해서 스페인, 이탈리아, 독일 등의 주요 가문의 문장에 이 백합이 들어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장례식 때 국화를 쓰듯이 영국과 미국에서는 장례식 때 흔히 백합을 쓴다고 하니, 영국이나 미국 사람들에게 꽃 선물을 할 때는 주의를 요할 필요가 있겠네요. 아, 백합의 흰색 이야기를 하려던 것인데, 잠시 옆으로 샜습니다. 다시 돌아와야겠습니다.
저는 어릴 때 백합 하면 무조건 흰색의 꽃인 줄 알았고, 당연히 백합의 한자어도 흰 백(白) 자를 쓰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백합은 노란색, 주황색, 분홍색 등 다양한 빛깔을 뽐내는 꽃이고, 백합의 백 자도, 흰 백이 아닌 일백 백(百) 자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백합(百合)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연유를 찾아보았더니 여러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중에서 제일 합리적인 것은 백합의 뿌리에 관한 것입니다.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백합 특징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데, 먼저 그 설명부터 보는 게 좋겠습니다. “높이 2m까지 자라는 구근(球根) 식물로 구근은 인경(鱗莖)으로 둥글다. 인경은 희거나 연노란색이고 직경은 10cm 내외다. 잎의 길이는 10~18cm이며 피침형으로 표면은 광택이 나고 엽병(葉柄)은 없다. 꽃의 길이는 15~18cm로 5~7월에 순백색 또는 황록색을 띠며 옆으로 향해 핀다. 고대 사람들은 구근을 요리해서 먹었으며 지금도 여러 나라에서 구근 요리를 먹고 있다. 점액 성분은 화장품에 이용된다. 화상, 뾰루지, 여드름에 바르는 연고에 사용한다. 오일에 절인 꽃잎은 습진을 치료하며, 꽃은 상업용 향수 제조에 쓰인다.”
인경(鱗莖)이라고 하는데, 한자를 그대로 풀면 ‘비늘[鱗]줄기[莖]’입니다. 앞서 인용한 장옥관 시인의 시에 “위벽 훑는 비늘줄기의 사나운 미각”이라고 했는데, 바로 그 비늘줄기가 인경이고 쉽게 말하면 알뿌리인데,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 눈으로 직접 보는 게 이해하는 데는 제일 좋겠지만, 그 알뿌리를 살펴보면 여러[百] 개의 비늘조각[鱗片]이 겹쳐서[合] 생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백 백(百)이 정확히 일백 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고 ‘여러’의 의미로도 쓰이지요. 그러니까 옛 중국 사람들이 그 뿌리의 모양을 보고 백합(百合)이라 이름을 붙였다는 설이 저로서는 제일 그럴듯합니다. 이러한 이름을 통해 중국에서는 백합을 그리거나 백합을 선물할 때에는 ‘백년화합(百年和合)’의 의미를 담는다고도 하지요.
암튼, 백합의 한자어는 흰 백이 아닌 일백 백, 백합(百合)이고 그 색도 꼭 흰색만 있는 게 아니라는 아주 간단한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네요.
위에서 제가 영국과 미국에서는 백합을 장례식 때 주로 쓴다고 말씀드렸지요. 아마도 영국인과 미국인들은 백합에서 ‘죽음’의 이미지를 느끼는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유홍준의 시를 소개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어디를 눌러야 할지
눌러야 할 피스톤이 없다

저것은 죽음을 불러내는 트럼펫,

있는 대로 목구멍을 열어젖히고
저것은
비명을 지른다

최대한으로 입을 벌린, 흰 백합 트럼펫의 주둥이……

나는 조곡을 연주했다

누가 저것을 주검에게 바쳤나,
검은 상복을 입고 새하얀 면장갑을 끼고

나는 검은 관 위의 흰 백합 트럼펫을 불었다
― 유홍준, 「검은 관 위의 흰 백합」 전문

유홍준 시인은 검은 관 위에 놓인 흰 백합을 보면서, “죽음을 불러내는 트럼펫”이라고 합니다. 그러고는 그 트럼펫으로 조곡을 연주하기 시작합니다. 망자를 떠나보내기 위해, 망자를 위로하기 위해, 누군가 검은 관 위에 올려놓은 백합. 그 흰색의 트럼펫이 연주를 시작합니다. 모차르트의 ‘미완성 레퀴엠 d단조 K.626’이 흐릅니다. 물론 이 백합이 부활의 나팔이 되기도 하지요.

지금은
긴 말을
하고 싶지 않아요

당신을 만나
되살아난
목숨의 향기

캄캄한 가슴속엔
당신이 떨어뜨린
별 하나가 숨어 살아요

당신의 부재조차
절망이 될 수 없는
나의 믿음을

승리의 향기로
피워 올리면

흰 옷 입은
천사의 나팔 소리

나는 오늘도
부활하는 꽃이에요
― 이해인, 「백합의 말」 전문

당신은 이제 백합 하면 무엇을 떠올리게 될까요? 무엇을 보게 될까요? 마지막으로 전경린의 소설 「천사는 여기 머문다」의 한 구절로 마무리할까 합니다.

“백합을 심고 싶었어요. 당신 알아요? 백합은 공룡의 추억을 가지고 있는 여름꽃이에요. 백악기에도 피었던 정말 오래된 꽃이죠. 백합은 햇볕 속에서 아무런 피해의식도 없이 평화롭고도 화려해요. 난 커다란 물뿌리개도 살 생각이었어요. 매일 작업을 마친 뒤에 물뿌리개에 물을 가득 채우고 태연하게 내려가 나의 백합에게 물을 주리라고 마음먹었어요. 그리고 새하얀 귀처럼 커다란 백합꽃에 입을 대고 내 마음을 조금씩 이야기하고 싶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