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스크랩북

여뀌꽃을 보면 나는 고향의 추석을 생각하게 된다.
아버지 산소로 가는 길은 늘 여뀌 패랭이꽃밭 같은 들을 지나야 했다.
벌레가 먹어 단풍이 든 여뀌 잎새. 얼만 전만 해도 서울 郊外(교외)에서 이런 모습의 여뀌풀을 보았는데 요즘은 여뀌 잎새를 먹는 벌레마저 없어져 나의 정서의 중요한 일부분을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으로 살고 있다.
여뀌는 산만 아니고 고향 김세골 개천가에도 많았다. 그 개천은 두만강으로 흘러든다.
내가 중학교 입학시험에 낙방하여 재수할 때 이 개천에 자주 갔었다. 그 냇가 줄기를 좀 따라 올라가면 천석애비라고 부르는 농부 집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그 집과 우리 집의 관계를 나는 잘 모르나 추수 때마다 옥수수며 참깨 강낭콩 떡 호박 같은 것을 우리 집으로 가져오고 우리 어머니는 그 집에 헌 옷가지를 주시는 그런 사이 정도로 나는 인식하고 있다.
천석이네는 두만강 건너편에 작은 밭을 가지고 있어서 나룻배로 건너갔다 왔다 하면서 농사를 지었다. 때문에 그 집은 모든 문이 활짝 열린 채 늘 비어 있었다. 필경 그런 빈 공간이 나를 편케 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든 좁쌀알 같이 작은, 붉고 흰 빛깔의 여뀌꽃이 나의 슬픔의 감정과 연관되는 이유는 당시의 나의 처지 때문일 것이다.
천석애비가 추수한 곡식을 조선 땅으로 옮길 때면 나루터 세관 사람과 순사들에게 그 절반은 줘야 한다는 둥―. 우리 집에서는 천석애비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화제로 떠올랐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던 천석애비가 어느 해 홍수 때 뱃길이 막혔다고 강을 헤엄쳐서 건너다가 그만 익사하고 말았다. 큰물에 시체도 찾지 못했고. 그래서 천석애미의 한(限)은 “추석 성묘할 수만 있어도” 하며 통곡하더란 얘기를 들은 것도 기억난다.
내가 보통학교 때, 겨우 걸음마를 하던 동생이 후두디프테리아에 걸려 급작스럽게 죽음을 당하였다. 그때의 슬픔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된다.
동생이 죽은 후 첫 추석에 우리 식구는 모두 아버지를 따라 처음으로 동생의 무덤을 찾아갔었다.
묘비도 없는 작고 초라한 붉은 흙더미, 동생의 무덤이라는 것이 저쪽 풀 속에 있었다. 너무도 슬펐다. 동생이 죽던 날처럼 그렇게 슬펐다. 거기에 어머니가 동생 무덤 앞에 엎드려 울고 있는 모습은 더 참을 수 없이 슬펐고 불쌍했었던 일로 기억된다.
해방되던 그해, 내 나이 스물두 살 때 추석의 감격은 잊을 수가 없다. 아마 그것이 추석 전날이거나 그 전전날 市場(시장)에서의 일이었다.
태평양전쟁으로 평소 시장은 팔고 살 물건이 없는 텅 빈 광장에 불과했었다.
그런데 그날은 어디서 그렇게 많은 물건이 있었던가 싶게 온갖 곡식과 엿과 떡과 돼지고기 쇠고기 돗자리들이 몰려들어 시장은 꽉 차 넘쳐 있었다. 너무도 놀라웠다.
해방이란 것― 조선독립이란 것― 자유라는 것― 을 처음으로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시장에는 소련 군인도 그들의 가난한 차림의 가족도 함께 나와 붐볐으나 추석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 매일경제신문 1992년 9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