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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 스크랩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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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있는 이야기 - 어느 여교사의 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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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를 마쳤으나 學兵(학병) 때문에 상급학교도 못가고 고향에 돌아와도 별 할 일이 없었던 미일(美日) 전쟁 중반기, 그때가 나에게는 절망적인 시기였다. 바로 그때, 간신히 취직된 곳이 가톨릭에서 경영하는 가난한 사립국민학교 교사자리였다. 그러면서도 이 교사 시절은 나에게 있어서 가장 즐겁고 아름다웠던 시기로 변했다. 감상적인 연령의 탓이었는지 모른다.
어떻든 교사자리는 전쟁 시기에 안전한 지대여서 여기서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면 되었다. 그러나 이 학교도 전쟁 막바지에 들어서면서 공립학교와 강제로 폐합 되어서 나는 우리 읍 동문 밖에 있는 작은 공립학교로 배치되었다.
새로 옮겨간 학교는 지금까지의 사립학교와는 달리 사범학교 출신들이 많았다. 그래선지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 같은 것으로 긴장된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런 경쟁은 나 같은 대용(代用)교사에게는 상관없는 그저 자격교사들끼리의 것이어서 나는 편했다. 오히려 그들은 나에게만 관대하였다. 물론 그때가 젊은이는 모두 징병, 징용으로 끌려가서 늙은 교장·교감을 제외하고는 남자라곤 나 혼자였다는 조건에서도 그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떻든 처녀 교사 다섯 속에 나 혼자였으니까.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날 내가 담임을 맡고 있는 4학년반 사내가 직원실에서 가네야마(釜山)라는 일본인 여선생에게 훈계를 받고 있었다. 이 학교의 관례로는 남의 반 아이를 벌하거나 문책할 때에는 먼저 해당 담임에게 양해를 구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서 여간한 일이 아니면 서로 이런 귀찮은 일을 하려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가 이 학교로 부임하면서 이런 관례가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에 가네야먀 선생의 훈계도 예사롭게 넘어갔다.
그런데 그 학생의 일이 다음 날 직원회에 교감선생에 의해 상정되었다. 내용인즉 그 애는 국어상용(國語常用) 조항에 위배된 상습적으로 조선말을 하는 아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가네야마 선생이 적당히 혼자 처리했다는 것이 문제라고 본 것이었다. 더구나 이번 경우는 교감 자신이 목격한 일이었는데 그럴 수가 없지 않느냐는 식으로 조선 사람인 교감이 되려 일본말 상용을 놓고 일본인 교사를 나무라는 좀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일이었다. 그러면서 교감은 가네야마 선생이 그 애의 담임인 나를 봐주기 위한 것처럼 혐의를 두고 말을 몰고 가는 바람에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가네야마 선생은 적어도 이 문제에 대해서 일본이고 조선이고가 아니고 교사의 사랑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 애의 친척 여동생이 1학년에 있어요. 그 1학년짜리가 시골서 기차통학을 하는데 4학년생 오빠가 집안 심부름으로 뭔가 그 동생에게 전하는 말이 있는 모양였습니다. 그런데 그 1학년짜리가 아직 일본말을 모릅니다. 그 4학년짜리가 상습적으로 조선말을 했다는 것도 그 때문이었고 이번도 그러했습니다. 사실 그동안 우리 학교는 남의 반 학생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불문율 때문에 그저 조선말이라는 것만으로 문제 삼았어요. 이번 4학년생의 경우는 조선말로밖에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나는 그냥 돌려보낸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문제를 삼은 다혈질의 교감은 그대로 물러설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자기 입장에서 감히 일본인을 사상문제로 몰 수 없었기에 젊은 여자가 윗사람에게 건방지다는 쪽으로 몰고 갔다. 사실 이 대목은 우리 젊은 교사들의 악역(惡役)으로 되어 있는 교감으로서는 너무 적격한 장면이었다. 그러나 젊은 가네야마 선생의 재치있는 말 때문에 그 문제는 적당한 선에서 멈춰버렸다. 가네야마 선생은 이런 얘기였다.
“교감선생님, 그 애들의 얘기는 ‘모다매(外祖母)’니 ‘모다바니(外祖父)‘니 큰집, 작은집이란 말로 연결되는데 이것들을 꼭 국어(일본말)로 하라고 해야 할까요?”
그러자 엄숙하던 직원회 분위기가 갑자기 웃음으로 변했다. 우선 일본인의 발음 그 자체도 우스웠지만 이런 사투리를 용케도 예로 삼아 그 교감의 입을 막아버린 통쾌함 때문이었다.
그 후 두고두고 보아도 가네야마 선생은 인간적으로 이해가 깊고 사랑의 의미를 아는 훌륭한 여자였다. 정말 오래 기억되는 여자였다.
- 유한양행 사외보 「건강의 벗」 1979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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