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 춤 스크랩북

나의 지능(知能)의 성장은 늦된 편이었다. 같은 나이(年令), 학년의 친구들은 모두 알고 이미 체험하고 있는 것이라도 나는 캄캄히 모르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때문에 악동(惡童)의 경험도 사춘기의 낭만적 경험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뒤늦게, 그것도 짝사랑 정도에서 멈추는, 다들 해먹고 떠난 뒷자리에서 빙빙 돌곤 하는 그런 식으로 그리워하다 마는, 사춘기를 보냈다. 그러니까 친구들 중 종교에 대해 사랑에 대해 정말 고민하고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을 보면 우선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사춘기와는 전혀 관계없이 나의 의식 속에는 언제나 ‘여자’라는 우상이 뚜렷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은 나의 성공과 연결되는 그런 여신
(女神)과 같은 것이었다. 나의 성공, 그 성공이 어떤 형태이든 간에 그 여인의 박수갈채와 존경을 받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은 아주 확실하였다. 구체적으로 언제까지였는지는 기억하지 못하나 이런 성공의 개념은 오래도록 나의 가치관이기도 하였던 것을 기억한다.
내가 중학교 5학년을 졸업하고 우리 마을 작은 사립국민학교 대용교사(代用敎師)로 취직한 것은 19세 때였다.
대학에 진학해야 한다는 원칙적인 고민을 빼놓는다면 나는 늘 유쾌하고 속없이 희희낙락하는 청년 교사였다. 그때가 태평양전쟁의 막바지여서 젊은 청년은 모두 징용 징병으로 뽑혔으나 교원시험 합격자는 다행히 혜택이 있어서 가지 않아도 되었다. 따라서 학교에는 젊은이가 별로 없고 처녀 교사와 늙은이뿐인 그런 분위기여서 나는 별 뚜렷한 일은 없었으면서 그런대로 낭만을 음미하며 책도 많이 읽은 시대였다.
그때는 무엇이든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시대였다. 가까운 시기에 우리나라가 독립이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혹 매력 있는 사람이 나타날 수도 있다는 막연하면서도 절대로 가능한 일을 기다리고 있기만 하면 되는 때였다. 그렇지만 정작 그런 날이 왔을 때를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해 막막하기도 하였다. 생각나는 것은 긴긴 여름방학 때면 언제나 하는 대로 학교 빈 교실에서 나는 책도 읽고 풍금도 치고 했는데 어느 날 내가 있는 교실 낭하로 누가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여자의 발걸음인 줄 금방 알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 사람이 누구였으면 하는 바램으로 변하였다. 이제까지 구체적으로 어느 하나를 생각한 일 없는 나에게 이 사실은 아주 이상한 일이었다. 과연 교실로 들어선 사람은 그 여인이었다. 그는 손위 누나의 여학교 때 의형제였는데 왜 그랬던지 자기 고향도 아닌 우리 마을로 와서 교원을 하고 있었다. 미모였고 교회의 젊은 찬양대 속에서도 단연 빛났었다. 그와 나는 근무하는 학교가 다르기 때문에 주일날 교회가 아니면 만날 수 없는 사이였다. 그리고 나는 진학해야 하니까 실제로 그녀를 생각한 일이 없었다. 그런데 이 일은 이상하였다. 더구나 그녀가 이렇게 찾아온 일도 이상하였다. 어떻든 나는 예의를 갖춰 그녀에게 무슨 이야긴가를 길게길게 하였다.
나는 이러한 청결한 여인관계를 청교도주의(淸敎徒主意)라고 스스로 자처하였다. 그러나 실상은 이해를 계산할 줄 아는 연령과 늦게 찾아든 ‘사춘기’ 때문에 지극히 이기적(利己的)으로 처리하는 몸을 사리는 청년이었지 청교도에서 그랬던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결국 어느 한 번 ‘사랑’ 때문에 목숨을 걸 기회를 얻지 못한 것은 마침내 인생의 고비고비를 충실히 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어떻든 그녀에겐 끊임없이 혼담이 있어서 그때마다 나의 결단이 필요했으면서 나는 용기가 없어 그 사내다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말았다. 나는 그때도 아직 지능이 뒤져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녀가 떠난 후 나는 오래도록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살아오는 동안 몇 번이고 결단이 필요한 기회가 있었으나 그때마다 나는 용기를 내리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후회는 하지 않는다. 그것대로 그것이 당시의 나의 최고의 결정이었으니까 말이다.

- 학원 1978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