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스크랩북

몇 년 전 돌아가신 무용평론가 조동화 선생(1922~2014)은 함경북도 회령 출신이시다. 선생은 한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고향 친구가 해방 당시에 겪은 일을 이렇게 전한다.

서울 근방 한적한 수력발전소의 기사로 있는 보통학교 동창에 J군이 있다. 한 달에 한번 정도 대학을 다니는 하나만의 아들을 보러 서울로 오는 정도, 별로 친구도 만나지 않고 다시 산속에서 평범한 생활을 하는 친구이다. 이것은 보통학교 때부터의 그의 성격이다. 때문에 그저 그렇게 사는 것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3, 4년 전 오래간만에 만난 한 친구와 고향 얘기를 하다가 J군의 집안 이야기를 들었다. J군이 월남하기까지의 짤막한 얘기지만 그 당시의 나 정도의 용기나 결단으로는 감히 생각도 못할 굉장한 것이었다. 그런데 J군은 한 번도 나에게 그런 자기 이야기를 한 적도 없었을 뿐 아니라, 모두들 거짓도 보태며 큰일 치룬 말을 자랑삼아 할 때도 J군만은 언제나 조용히 그런 말을 듣고만 있었다. 회령에 진주한 소련군들은 일본인들을 분류 수용하고 처형하기도 하였다. 하룻밤 사이에 천하가 바뀌어 일본인이 당하는 꼴은 통쾌하기도 하였으나 젊은 부녀자들이 당하는 기막힌 사정에는 의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만 생각할 뿐, 그 당시의 대의명분과 개인의 힘으로 감히 어떻게 할 도리는 없었던 바로 그때, J군은 일본인 일가족 5명을 빼내어 자기 집 천정 속에 며칠 감춰 두었다가 변장시켜 같이 월남하였다는 것이었다. 그 후 나는 J군을 만났을 때 그 당시의 이야기를 물었더니 그는 아주 멋쩍은 표정으로,
“아이를 업은 한 일본부인이 내 곁으로 와서 배앓이에 먹는 약을 청하는 거야. 그리고 그가 말하는 그 수용소 사정은 말이 아니고, 세 아이는 모두 배앓이…… 그리고 남편은 아마 오늘밤 중으로 죽게 될 거라는 거 아냐! 어떻게 해? 운 나쁘게 걸린 거지! 구원을 요청하는데 가만 있을 수 있어? 그래서 그에게 가족을 데리고 수용소 뒤쪽에 나와 있으라고 했지! 그리구 철망을 끊고 데려 내온 거야. 밉지만 말이야, 손들고 살려 달라는데 불쌍했어. 5, 6세쯤 되는 그 셋째 애가 철망을 기어나올 때 머리가 한 뼘이나 찢겨 피가 줄줄 나는데도 소리내지 못하고 벌벌 떨고 있는 것을 보구, 나는 내 한 일이 잘된 것이라는 신념을 가졌어! 얼마나 무서운 세상이었으면 꼬마가 울지도 못했겠어! 동두천까지 와서 이제는 무사히 월남하였다는 말을 했더니 그 부부가 나를 붙들고 막 우는 거라! 창피해서 혼났어! 그때부터 그놈들이 또 막 미워지지 않아? 그리구 난 그들을 내버리고 서울에 오고, 아마 그들은 그곳 일본인 수용소에 떨어졌을 거야!”
(조동화, 「함경도 사람들」, 《북한》, 1973년 10월호, 북한연구소, 252~253쪽.)

그러하다. “운나쁘게 걸린 거”라 입맛이 써도, 생각하면 “또 막 미워지”더라도 차마 돌아설 수 없는 마음. 가끔 그렇게 우리는 우리를 속이며 이 ‘무서운 세상’을 겨우 건너간다.

서문을 대신하여
2019년 여름, 배삼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