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살롱

고대 유대사회의 전통 법정 ‘산헤드린(Sanhedrin)’은 수십 명 재판관의 만장일치로 평결했지만 사형의 경우 오히려 만장일치가 나오면 선고를 못하게 했다. 목숨이 달린 일에 단 한 사람의 이견도 없다면 정상이 아니라는 합리적 의심을 제도화한 것이다. 보수니 진보니 하는 진영논리와 확증편향이 들끓는 요즘 시류를 부끄럽게 만드는 역사의 지혜다.
회색인(灰色人), 회색지대를 조명해보자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 흑백 갈등에 넌더리가 나다 보니 다소 답답 모호하고 기회주의마저 연상케 하는 희뿌연 회색이 뜨는 것이다. 우유부단한 회색인임을 자처해온 나로선 반가운 일이다.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이후 요즘 조국 법무장관 후보자 사태에 이르기까지 온 나라가 분열과 편가르기, 양극단 갈등으로 지새던 터였기에 더욱 그렇다.
신문기자 출신의 소설가 장강명은 근래 일간지 칼럼을 통해 당혹스러운 경험을 토로했다. 주로 일자리 절벽에 무기력한 청년들, 헬조선 외치며 이민 가겠다는 절규, 정보기관의 인터넷 여론조작, 척박한 노동 현실 같은 사회비판성 작품을 내놓았다. 그런데 그때마다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는 분이 왜 이런 소설을 쓰느냐”는 질문을 받고 아연실색하곤 했다는 것이다. 피폐한 청년과 육체노동의 고단함에 대한 관심은 진보의 전유물이란 말인가. 진보 진영에는 그저 간편하게 ‘보수는 악’이라고 간주하는 풍조마저 번진다.
판사를 지낸 윤재윤 변호사는 쉽사리 단정하고 판결 내리는 오늘날 일부 법조인에 대해 오래전 유대의 산헤드린 법정보다 못한 것 아니냐는 자괴를 한다. 한 에세이에서 “흑백의 세계는 무지와 퇴보의 세계임을 역사가 보여준다. 회색은 흑과 백이 어우러진 조화로운 색이다. 특징은 없지만 겸손하고, 성찰과 지혜가 담긴 색”이라고 칭송했다. 김병익 문학평론가는 대한제국을 팔아먹은 친일파의 상징 이완용의 전기를 읽으면서 심란했다. 특히 그가 선행을 많이 했다는 대목에서 인간은 매우 착잡한 존재라고 느꼈다. "한 인간의 겉을 벗기고 안을 들여다보면… 숱한 복합, 이종, 변형, 나아가 형용모순의 수식이 필요한 경우로 범벅이 된다”고 평했다.
조국이 법무장관 후보자로서 온갖 수모를 당하게 된 것은, 우리 현실과 주변 인물 중에서 이완용에서조차 엿보이는 회색지대, 회색인이 많다는 평범한 진리에 무감한 탓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가 적대시하는 이들에게 말과 글, SNS를 동원해 퍼부은 독설들이 이제 말빚이 되어 고스란히 그에게 청구서로 몰려드는 것이다.
한일 갈등이 불거진 직후 때마침 나온 ‘반일 종족주의’라는 보수학자들의 공저에 대해 “구역질 난다” 고 욕설을 퍼부은 것만 해도 그렇다. 위안부나 징용, 독도 문제만 해도 다양한 회색지대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조국은 생리적으로 거부한 셈이다. 보수 정권은 악, 진보정권은 선이라는 이분법 흑백 구도 아래 과거 권력을 적폐청산의 이름으로 몰아붙였다. 그러면서 인간은 욕하는 행실을 따라하기 십상인 부조리한 회색인임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회색지대는 양시양비론의 문제가 아니라 역지사지와 내로남불의 영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