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살롱

올해 815처럼 ‘항일(抗日)’이 도드라진 해가 없는 듯하다. 31운동 100주년의 해에 일본이 무역전쟁을 걸어왔고, 극장가에서는 항일영화 「봉오동 전투」가 호응을 얻었다.
나 역시 나름대로 만화에서 항일의 의미를 되새겨보고자 했다. 내가 일말의 고민 없이 서가에서 꺼내든 만화는, 항일만화의 최고봉인 박기정의 「폭탄아」였다. 그리고 나는 8월17일 박기정 화백과 소주잔을 부딪치며 「폭탄아」를 추억했다. 1964년 8월 첫선을 보인 후 60여 권이 출간된 「폭탄아」는 현재는 잔존량이 거의 없는, 아주 귀한 만화책이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 이를 복간본(전 8권)으로 발간하면서, 「폭탄아」는 우리 시대에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박기정 화백은 복간을 위해 소실된 약 30여 페이지를 새로 그려 넣어 「폭탄아」 텍스트를 완벽하게 재현했다. 박기정 만화의 와룡(臥龍)과 봉추(鳳雛)라 할 수 있는 「폭탄아」와 「도전자」가 비로소 짝을 맞추게 된 셈이다.
「폭탄아」의 무대는 만주국 하얼빈이고, 시점은 일본 야마토(大和) 전함의 침몰(1945년 4월 7일)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1940년대 초부터 일본 패망 직전까지다.
「폭탄아」는 한 마디로 만주국에서 벌어진 치열한 첩보 전쟁과 밀정을 다룬 이야기다. 주인공 탄아, 탄실 남매는 일본 제25 헌병대에 침투한 독립군 밀정인 아버지가 체포되면서 뿔뿔이 흩어진다. 탄아는 일본군에게 속아 일본소년군관학교에서 독립군을 처단하는 살인기계로 육성된다. 여동생 탄실은 자신의 과거를 모른 채 마적단 두목의 수양딸로 자란다.
「폭탄아」는 한 번은 탄아, 다른 한 번은 탄실을 비춰주는 교차 구성 방식을 취한다. 1권에서 헤어졌던 남매가 작품 말미에서 재회하기까지, 독자는 애가 탈 수밖에 없다.
「폭탄아」는 한순간도 쉼 없는 스파이 전쟁의 연속이다. 「폭탄아」의 두뇌 싸움과 액션에 비하면, 톰 크루즈의 「미션 임파시블」 시리즈는 명함도 내밀기 어렵다. 독립군, 일본군, 마적, 중국인 등 4개 세력이 서로 정보를 빼내고, 함정을 판다. 함정, 역함정, 역역함정, 역역역함정까지 생사를 건 밀정들의 사투가 조마조마하다. 소재, 구성의 긴장과 재미를 극대화하는 요소는 바로 캐릭터다. 일제에 속은 것을 뒤늦게 깨닫고 일본군에 복수하는 탄아, 탄실 남매를 제외한 조연 캐릭터들마저 곳곳에서 자체발광한다. 탄아를 살인기계로 조련하는 긴다 소령의 딸이지만 탄아에게 영혼을 바친 하나꼬부터 「오셀로」의 이아고보다 더 교활한 일본 장교 시하메, 의리의 중국인 친구 작장면, 일본 귀족 집안의 자제이지만 게이샤 아들이란 설움 탓에 비뚤어져 무국적 광대가 된 다구찌, 긴다 소령이 조련한 여자 스파이 네꼬까지.
박 화백은 조연 하나하나의 개성과 생명을 세심하게 빚었을 뿐 아니라, 스토리의 씨줄과 날줄이 교차하는 지점마다 이들을 정확히 배치했다. 「폭탄아」는 한국 만화 사상 가장 입체적 작품이다. 시간이 지나면, 「폭탄아」 복간본의 가치는 더 상승할 것이다. “나는 항상 작품 말미에 일본과 화해의 여운을 둔다”면서도, 작가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폭탄아」 복간본 서문에서 박 화백은 “과거(일본의 만행)를 망각한 사람은 미래가 없다”고 쓴 후, 밑줄을 두 개나 그어놓았다. 이것만은 절대 잊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