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스크랩북

가을 거미줄은 하루만 걸러도 나무를 덮는다. 오동나무 가지의 휜(曲) 장대는 그래서 바쁘다.
아침저녁 벌레 소리가 요란하다. 나의 작은 庭園(정원)에도 가을빛이 완연하다.
빗물 흐르게 만든 얕은 도랑에 단풍든 담장이와 벌레 먹은 배나무 잎새들이 깔리기 시작한다.
그림자 속으로 기어들던 담장이 순이 여름 사이 長臺石(장대석)을 넘어 아래 꽃밭까지 내려왔다. 담장이 잎새는 초여름 한번은 쳐줘야 둥글고 작은 잎새를 얻을 수 있는데 꾀가 생겨 그대로 넘겼더니 머루 잎새처럼 커져서 좁은 뜰을 더 좁혔다.
전에 살던 사람이 두고 간 배나무 한 그루를 구실삼아 향나무들은 모두 치워버렸지만 사실은 좁은 뜰에 찌르는 것까지 같이 살 수 없어서였다. 그러면서도 긴 가시의 향당나무와 며느리밑씻개의 가시풀은 그대로 둬 두고 있다. 좁은 뜰의 원칙도 한갓 되지 못하다.
계절 바뀔 때마다 벌레 종류가 바뀌어서 배나무 잎새를 갉아먹는다. 그래서 패잔병의 軍旗(군기)처럼 배나무의 몰골이 비참하다. 그런데 담 밖에서도 보이는 주렁주렁 달린 참배는 그저 감탄스럽기만 하다.
그림자 속에서 꽃 피지 못한 모란과 작약을 지난봄 양지쪽에 옮겼지만 역시 꽃이 보이지 않는다. 너무 지치면 회복도 오래 걸리는 것. 내년이 기다려진다. 작약의 모습은 모란과 비길 바 아니게 추하다. 그래서 꽃은 모란을 치는 모양인가.
대학생이 된 둘째가 중학교 첫 여름방학 숙제로 채집해온 무릇 한 뿌리를 꽃밭 한구석에 심었는데 이제는 온통 무릇밭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장다리에 수수알 보라꽃이 피는 여름 한 철은 벌 나비까지 야단이더니 이 가을 힘 있던 그 꽃장다리들은 쓰러져 누워버렸다.
조릿대도 무성하다.
洗劍亭(세검정) 朴선생 宅에서 얻어 온 억세도 숲을 이루어 그쪽에 서면 가을바람 소리가 들린다.
창포의 마른 잎새에 향기가 남아 있다. 창포의 마른 잎새를 짚더미처럼 쌓고 거기에 파묻혀 한겨울 나보고 싶다.
도라지는 차라리 여름꽃, 벌써 씨를 胚胎(배태)하고 신음하고 있으니 그게 어디 가을꽃인가.
쐐기벌레는 철쭉에도 붙어산다. 벗은 팔에 몇 번 당했다. 한 번 당하면 그 아픔이 열흘씩 간다.
蘭盒(난합)에 옮긴 피멎이풀이 완전히 자갈을 덮어 아름답다. 그런데 정작 난초는 시름시름 앓고 있다. 그러니까 이 두 놈은 궁합이 맞지 않는 모양인가. 그러나 아직 포기할 생각은 없다. 나보다 먼저 이런 짓 해본 분이 있으면 助言(조언) 바라고 싶다.
아버지는 서리 내리기 전에 파초를 파내어 마루 밑 따스한 움 속에 간수하셨다. 그러나 내 뜰은 좁아서 파초의 넓은 잎새가 어울리지도 않고 또 나는 게을러서 파내고― 옮겨 심고 하지 못해 혼자 겨울 나는 식물 이외는 간수할 수가 없다.
나무도 이 이상 더 크지 말고 이 정도에서 멈췄으면 좋겠다.
큰 감나무 갖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내 뜰은 너무 좁다. 그렇다고 넓은 뜰이 생길 때면 이미 나는 기력이 없어 돌 하나 옮기지 못할지 모른다.
가을 정원은 어쩐지 슬프다.
- 월간 문화재 1981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