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스크랩북

간혹 박물관이나 잡지사 같은 데서 마련하는 여행이면 친구와의 언약도 이루어지고 하여 챙기고 나서게 되지만 정작 혼자의 결단이나 계획으로는 주말여행 같은 것은 결국 나서보지 못하고 요몇해를 살고 있다.
다행히 요즘은 사무실이 창경원 근방이어서 이쪽 고궁의 오후 산책은 비교적 잘 되는 편이다. 그러나 자연을 가까이 가졌다는 것은 익숙하다는 것과 연결되어 태만해질 수도 있다. 어떻든 나에게 있어서 이런 즉흥적인 나들이 경력은 비교적 오래다. 훌쩍 사무실에서 빠져나와 한번 쓱 거닐고 오는 것―.
필경 멀리로 못가는 것의 보상행위일 테지만 여하간 그리도 득 보는 기분일 수가 없다.
나의 이런 산책은 비 온 뒤나 아침 일찍을 택하게 된다. 다른 사람이 없는 조용한 곳을 차지하기 위해서이다. 만일 여기까지도 사람이 치이는 것이라면 차라리 오지 않음만 못한 것이 아닌가?
나는 이럴 때처럼 사치감을 느낄 때가 없다. 자연을 음미할 수 있다는 것은 도시인에게 있어서 확실히 하나의 사치다. 나는 의식적으로 이 사치를 즐기는 것이다. 산다는 각박한 主題(주제)에서 벗어나 인생이란 것을 생각해보고 멍청하게 하찮은 것을 구경도 하고, 외로움도 느끼고, 구체적인 한 사람을 생각도 해보고 그와 나의 관계나 장래를 점쳐도 보고 하는 시간―.
같은시간에 으례 이런곳에서 만나는 비슷한사람들이 있다. 따분한 인간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존경심을 갖는다.
사치를 아는 人士―그렇게 단정하니까. 결국 나는 나 지신을 존경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언제부터인가 등산 옷차림의 행려객들이 많아졌다. 이들이 찾는 곳은 모두 비슷하여, 이름 있는 유원지나 名勝地(명승지)는 만원을 이룬다.
나는 이런 이들에게 놀이나 여행의 새로운 지혜를 가져보기를 권하고 싶다.
중학교 때 지혜로운 선생을 따라 여행했던 곳은 모두 기억되고 그리워진다. 赴戰高原(부전고원) 금강산 칠보산 등등 지금 생각하면 이런 곳들이 내 살던 고장의 바로 이웃이었기는 하나 그렇다고 막연히 놀러 가는 형식이 아니고 이른바 「사전계획」이라는 과정을 거쳐 간 곳. 머물 곳을 미리 지도 위에 예정하고 길을 타협하는 그런 작업을 거친 것이었다. 그 선생은 어느 한 곳이든 우리가 거칠 곳은 미리 알아야 한다는 방식을 취하였다. 지혜로운 일이었다. 그렇게 찾아간 곳이기 때문에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다. 이름 붙여서 「역사의 여행」이니 「사찰순례」니 아니면 「경치 찾기」니 하는 명분을 만들어 길을 떠나고 장소를 찾는것은 현명한 일이다. 그 갈 곳을 미리 논의하는 과정…이것은 갔다는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다.
물론 너무 의의와 교양을 찾는 나머지 자유로운 들놀이가 너무 딱딱해질 염려가 없지 않다. 설혹 그렇더라도 막연한 들놀이에서 당하는 붐빔과 피로에 비하면 이것은 하나의 지혜임에 틀림이 없다.
「모처럼의 일요일」― 가족들은 밖으로 나가기를 원하지만 「모처럼의 일요일」을 맞는 아빠는 집에서 쉬고 싶다. 사실 도시인에게는 일상적인 것 이외의 변화는 그것이 즐거운 놀이고 여행일지라도 부담스런 일임에 틀림이 없다. 도대체 챙기고 나선다는 번거로움 때문이다. 그러나 이럴 경우에도 우리는 이 「챙긴다」는 것을 뚜렷이 하나의 작업으로서 의식시키는 지혜를 가질 수 있다면 오히려 이것 때문에 쉽게 떠날 수 있는 이유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런 작업을 아빠에게 맡기지 말고 가기를 원하는 집안 다른 식구들이 모두 만들어만 놓는다면 변화를 무서워하고 피곤하더라도 응하지 않을 수밖에 없게 된다.
준비 있는 들놀이…이 지혜만이 우리를 즐겁게 할 수 있다. 정신이 편안치 않은 즐거움이란 있을 수 없지 않을까? <隨筆家, 月刊 춤 發行人>

- 한국일보 1976년 4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