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향시향

수석이 취미인지라 전국의 이런저런 강이며 계곡을 제법 다녔습니다. 주로 강가든 계곡이든 돌밭을 다니며 그저 눈에 맞는 돌을 찾느라 여념이 없지요. 주변의 꽃을 돌아볼 여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눈에 들어오는 꽃들이 있기는 합니다. 워낙 크고 색깔이 선명해서 눈길을 피할 수 없는 그런 꽃도 있지요. 그중의 대표적인 꽃이 바로 원추리꽃입니다.
몸은 하나인데 사람마다 지역마다 시대마다 쓰임새마다 불리는 이름이 제각각인 그런 꽃이지요. 원추리는 한자로는 훤초(萱草)인데, 특히 중국에서 원추리를 부르는 이름은 워낙에 많습니다. 오래전부터 원추리꽃을 어머니를 상징하는 꽃이라 해서 훤초화(萱草花)라고 불렀습니다. 이와 관련한 한시 한 편 소개합니다. 당나라 시인 섭이중(聶夷中)의 시 「나그네의 노래(遊子吟, 유자음)」입니다. 집을 떠난 화자가 집에서 아들을 그리워하고 있을 어머니의 마음을 그리고 있는데, 원추리꽃으로써 어머니(의 마음)를 그리고 있지요.

萱草生堂階(훤초생당계) 원추리가 어머니의 방 섬돌 앞에 피었는데
游子行天涯(유자행천애) 떠난 자식은 하늘 끝을 헤매이네
慈親倚門望(자친기문망) 어머니는 문에 기대어 하늘만 바라보실 뿐
不見萱草花(불견훤초화) 원추리꽃은 보지 못하시네

시 속에 등장하는 훤초(萱草)가 바로 원추리이고 훤초화(萱草花)가 원추리꽃입니다. 훤(萱) 자는 원추리를 뜻하기도 하지만, 자당(慈堂)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자당은 어머니를 높여 부르는 말이니 훤초가 어머니를 상징하는 꽃임은 금방 아실 테지요. 예전에 어머니가 거처하시는 공간인 북당(北堂)을 흔히 훤당(萱堂)이라 불렀습니다. 남의 어머니를 높여 부를 때 흔히 ‘훤당(萱堂)’이라 부르는 연유입니다. 한편, 중국 사람들은 원추리꽃을 근심과 걱정을 잊게 해주는 꽃이라 하여 망우초(忘憂草)라 부르는데, 이에 대한 기록은 『시경(詩經)』의 「伯兮(백혜)」에 나옵니다.

어디서 원추리를 얻어다가 뒤꼍에 계속 심을까
[焉得諼草 言樹之背(언득훤초 언수지배)]
그대 향한 그리움은 내 마음을 병들게 하네
[願言思伯 使我心痗(원언사백 사아심매)]

그런데 여기에 보면 한자가 훤초(萱草)가 아니라 훤초(諼草)입니다. 잊을 훤(諼) 자를 쓰는 훤초(諼草)는 본래 근심을 잊게 해준다는 상상의 풀, 망우초(忘憂草)인데, 원추리 훤(萱) 자와 잊을 훤(諼) 자가 발음이 같아서 원추리를 훤초(諼草)로 불렀던 것이고, 자연스레 원추리가 망우초를 대표하게 된 것이라고 하지요.
원추리를 망우초(忘憂草)로 부르는 것과 관련해서는 당나라 황제 현종이 양귀비와 정원을 함께 걸으며 “원추리를 보고 있으면 근심을 잊게 되고 모란을 보고 있으면 술이 깬다”라고 말했다는 기록도 전해지고, 또 이런 전설도 전해집니다.
옛날 옛날 어느 마을에 효심이 깊은 형제가 있었는데 어느 날 부모가 한꺼번에 세상을 떠납니다. 형은 슬픔을 잊기 위해 부모의 무덤가에 원추리를 심었고, 동생은 난초를 심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형은 슬픔을 잊고 열심히 일을 하며 살았지만 동생은 세월이 흐를수록 그 슬픔이 깊어져 마침내 병까지 얻어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동생의 꿈에 부모가 나타나 이런 얘기를 들려줍니다. “사람은 슬픔을 잊어야 살 수 있다. 너도 형처럼 무덤가에 원추리를 심고 이미 세상을 떠난 우리를 그만 잊거라.” 꿈에서 깬 동생은 부모의 뜻대로 무덤가에 원추리를 심었고 마침내 슬픔을 잊고 병도 낳았다는 전설입니다.

원추리를 망우초로 쓰는 것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추사와의 스캔들로 유명한 평양 기생 죽향(竹香)의 「화훼초충첩(花卉草蟲帖)」 13폭이 소장되어 있는데, 그중 「백양노인법(白陽老人法) 화접도(花蝶圖)」에 보면 원추리꽃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아래쪽에는 구절초 그리고 위쪽에는 나비가 그려져 있고 가운데에는 원추리꽃이 가득 피어 있습니다. 구절초와 나비는 장수(長壽)을 기원하는 뜻에서 그린 것이지요. 나비 접(蝶) 자와 여든 살 늙은이 질(耋) 자는 중국 발음으로 ‘디에’로 같지요. 그래서 옛날부터 장수를 기원하는 상징으로 흔히 나비를 그렸더랬지요. 그림 속의 원추리는 그러면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요? 네 떡두꺼비 같은 아들 낳으라(득남초, 의남초), 그래서 모든 근심과 걱정일랑 그만 잊으라(망우초)는 뜻으로 원추리를 그려넣었던 것이지요.
매월당 김시습(金時習)의 시 중에도 원추리 망우초로 노래한 게 있는데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庭院日長無事家(정원일장무사가)
정원에 해는 길고 집안에는 아무 일 없는데
一雙鵠觜向人呀(일쌍곡취향인아)
한 쌍의 고니 부리인 양 사람을 향해 벌려 있네
知渠定是忘憂物(지거정시망우물)
저것이 분명 시름을 잊게 하는 망우물임을 알겠네
不競東風桃李花(불경동풍도리화)
동품에 복사꽃과 오얏꽃이 다투지 않는다네
― 김시습, 「훤화(萱花)」 전문

김시습의 눈에는 원추리꽃(萱花)이 한 쌍의 고니가 사람을 향해 부리를 벌리고 있는 모습으로 보였나 봅니다. 그리고 그 원추리꽃을 보면서 저것이 망우물(忘憂物)이로구나 세상 근심 다 잊게 해주는 망우초(忘憂草)로구나 읊고 있지요. 아, 본디 망우물은 술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원추리를 그리 표현한 것이겠습니다.
원추리는 또 꽃봉오리가 사내아이의 고추를 닮았다고 하여 득남초(得男草), 원추리 뿌리에는 아들을 낳게 해주는 영험한 기운이 있다 하여 의남초(宜男草)라 불리는데, 실제로 옛 중국에서는 어머니가 기거하는 처소 앞과 뒤뜰에는 원추리를 심었다고 합니다. 아들을 낳게 해달라는 염원을 담아서 말이지요.
그밖에도 꽃에서 풍기는 향기가 성적 감흥을 일으켜 부부금슬을 좋게 해준다 하여 금침화(衾枕花), 아기 고추 같던 봉오리가 활짝 피었다가 다시 봉오리처럼 오므라든다고 하여 합환화(合歡花), 등등 많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넘나물이라고 해서 원추리 순을 무쳐 먹기도 하는데, 이 나물을 먹으면 부부 금슬이 좋아지니 ‘합환채(合歡菜)’라 부르기도 하고, 언젠가 중국 영화에서 황제의 씨를 얻으려고 첩이 황제 베개 속에 말린 원추리씨를 몰래 숨겨두고 잠자리에 드는 장면을 본 적이 있는데, 원추리에는 과연 그런 효험이 있기는 있는 모양입니다.
영어로는 데일리릴리(Daylily) 즉 하루만 피는 백합이라 불리는데, 원추리꽃이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꽃이라 하루만 꽃을 피우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지요. 그래서 일일화(一日花)라는 별명도 지닌 꽃이 바로 원추리꽃입니다. 참 많은 별칭을 지닌 꽃이지요. 아무튼 원추리꽃은 상황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 다양하고, 이름에 따른 수많은 시화(詩畵)가 전해진다는 사실이 무척 흥미롭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원추리를 지칭하는 다양한 이름을 말씀드렸는데, 원추리꽃을 모르실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 인터넷 두산백과와 네이버 지식백과에 나온 것을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원추리는 외떡잎식물로 백합목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이다. 흔히 넘나물이라고도 하는데, 주로 산지에서 자라고 높이는 약 1m이다.”(두산백과)

“원추리는 우리나라 자생종으로 여러 종류가 있다.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로 뿌리는 한약 재료로 쓴다. 봄에 돋아나는 연한 잎은 나물로 이용한다. 해가 드는 양지바른 곳에서 잘 자란다. 나리와 마찬가지로 종류가 많다(각시원추리, 노랑원추리, 섬원추리, 왕원추리, 골잎원추리, 애기원추리 등). 주로 꽃의 모양이나 색깔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지식백과)

원추리의 꽃대가 1m까지 자란다니 어느 계곡에 피었든 어느 들판에 피었든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겠지요. 이렇게 기다랗게 자라는 원추리를 보면서 안도현 시인은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왜 이렇게 높은 곳까지 꽃대를 밀어 올렸나
원추리는 막바지에 이르러 후회했다
꽃대 위로 붉은 새가 날아와 꽁지를 폈다 접었다 하고 있었다, 원추리는
어쩔 수 없이 방을 내어주고 다음 달부터 여관비를 인상한다고 똑 부러지게 말하지 못했다
멀리서 온 것이나 키가 큰 것은 다 아슬아슬해서 슬픈 것이고
꽃밭에 널어놓은 담요들이 시들시들 마르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가을이 되면 어린 잠자리들의 휴게소로 간판을 바꾸어 달아도 되는지 면사무소에 문의해 볼까 싶었지만
버스를 타고 올라오기에는 너무나 멀고 낡은 집이어서 관두기로 했다
원추리 꽃대 그늘이 흔들리다가 절반쯤 고개를 접은 터였다
― 안도현, 「원추리여관」 전문

원추리가 꽃대를 높은 곳까지 밀어 올린 이유를 알겠는지요? 높은 곳까지 밀어 올려서는 절반쯤 고개를 접은 이유는 또 알겠는지요? 높이높이 밀어올린 꽃대 위로 노랗게 핀 원추리꽃 한 송이. 그 꽃을 일러 시인은 여관이라 합니다. 여관이 되어 아슬아슬해서 슬픈 것들을 받아주고 재워주는 것이라 합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중구난방으로 떠들었는데, 원추리를 소재로 쓴 매월당 김시습의 또 다른 시 한 편 읽는 것으로 글을 마쳐야 할 것 같습니다.

원추리는 근심을 잊게 하니
집 뒤꼍에 이 꽃을 심는다 하네
입 벌린 황곡의 머리 깃 같아
예쁜 모습 단정하여 사랑스럽네
그 누가 아녀화라 말을 하는가
초록 줄기 기개가 늠름도 한데
굳고 곧아 세속을 따르지 않으니
빛깔 실로 어여쁨 뽐내고서
아침에 피어 저녁에 시듦이 안타깝구나
― 김시습 「훤초(萱草)」 전문

가을이 깊어져서 이제는 어느 산 어느 들을 가도 원추리꽃 보기 어렵겠지만, 혹여라도 때 없이 핀 원추리꽃을 보시거든 당신은 어떤 이름으로 불러주실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