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스크랩북

복싱은 엄격한 룰과 사치스런 규제가 있는 신사다운 게임이어서 우선 좋다. 만일 세련된 규제가 없다면 그것은 비겁한 싸움에 불과하지 스포츠일 수는 없다. 싸움이란 지지 않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감정적(感情的)인 데 반하여 복싱은 이기기 위하여 룰을 지키고 그것에 순종하는 이지적(理智的)인 것이 다르다.
상대를 이제 한 판치로 처리할 수 있게 된 순간, 공이 울려 돌아서야 하는 자제력(自制力)의 발휘― 싸움과 복싱은 이것 하나로 구별할 수 있다.

복싱은 인간이 고안해낸 가장 동물적인 쇼고 자학적인 게임이다. 가축 마냥 몸무게로 급(級)을 정하는 것부터 복싱 제1조는 정신 상위의 인간의 격을 무시하고 있다. 거기에 마치 발톱과 이빨을 뺀 늑대들의 놀음 마냥 정작 자신 있는 주먹에는 솜뭉치를 감고 소리는 반칙으로 묶어놓고 그 다음을 가지고 싸우게 하는 것은 어쩐지 자학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인도적인 고려라는데 누가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대로 그 게임으로 원시적인 흥분과 충격을 충족시킬 수 있으면 되지 않는가?
현대인에게는 때로는 자학도 필요하고 물리적 힘이 정신을 능가한다는 사실도 확인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마침내 인간은 한 마리의 동물이 아닌가?

「親善권투」라는 이름의 복싱을 볼 때처럼 인간 논리의 궤변성을 느낄 때가 없다. 서로 친하기 위하여 때려누이겠다는 것― 사랑하기 때문에 잡아먹는다는 발상(發想)과 뭐 다를 바 있는가? 사실 친선게임을 하다가 얻어맞아 죽은 권투선수도 있었을 성 싶은데― 어떻든 우수하고 성능이 좋은 무기가 만들어지면서 인간의 원시적인 완력은 결국 때려도 아프지 않고 오히려 때려줌으로써 친선이 되는 애교물이 되어버린 사실이 슬프기만 하다. 어떻든 복싱의 개념은 방어나 공격이 아니고 때리고 얻어맞음으로써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그런 높은 차원의 행위로 되어버렸다. 복싱과 예술과 통하는 또 다른 채널은 여기서 구해도 될 것 같다.

복싱과 예술은 또 인생을 건다는 것으로서 공통되고 개성적인란 것으로도 공통된다.
복싱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여기에 자기를 걸고 있기 때문이다. 「건다」는 말 속에는 실패와 성공이 절반씩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력으로 해결되는 일이라면 굳이 건다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리고 「건다」는 말 속에는 행운과 우연이 더 많이 작용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사실 복싱 절정(絶頂)은 실력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찬스에서 이루어진다. 만일 찬스를 얻지 못하면 실력도 써볼 수 없이 끝나버리고 만다. 찬스를 포착하는 눈과 느낌… 복싱이 예술이어야 한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복싱의 건강함은 승부가 뚜렷하고 그 승부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는 데 있다. 만일 복싱에서 승부는 최선이 아니고 차선이라고 하면 우선 복싱은 스스로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왜냐하면 상대를 제어하고 나를 구하는 것을 전제가 되지 않는다면 이것은 한갓 마조히스트들의 자위도구의 뜻밖에 의미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외아들에게 복싱을 권하는 아버지가 있다면 아들이 타인보다 강하기 위하여서지 맷집 좋게 되기를 원하여서는 아니다.

복싱은 1대1로 이루어지는 스포츠다. 1대1이란 곧 대결을 의미한다. 굴복시키느냐… 당하느냐… 어느 하나밖에 선택할 수 없는 것이 대결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복싱에 무승부라는 말은 있을 수가 없다.
1대1의 대결은 남성에게 있어서 가장 용기가 필요한 행위이어서 한번은 꿈꿔보는 일이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1대1의 대상을 얻을 수가 없다. 복수(複數)로서 맞서기 때문이다. 오늘의 우리가 복싱에 흥분하는 것은 그 1대1의 대결 그것에 향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이런 대결에서 승리한 조상의 후예라는 데도 이유가 있다. 그때 패자는 죽어서 후손을 남길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남성에게 있어서 젊음의 가장 상징적인 표현을 무엇일까?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힘과 공격의 행위이다. 그런 의미에서 복싱은 젊음 그 자체이고 그 집약이다. 복싱은 나를 인식시키고 확인케 하는 유일한 수단이고 방법이다.

힘껏, 마음껏 그리고 정확하게 치라! 힘은 곧 정의고 진리고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워지라! 정의와 진리를 사랑하자! 이것들은 오직 힘으로만 구현할 수 있다.

- 月刊 판치라인 1976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