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살롱

한참 전 일이다. 팔순을 넘은 노신사와 나눈 대화가 나를 놓지 않는다. 당시 동경유학을 하고 법관을 지낸 명실상부한 엘리트가 얼마 전 남편을 여윈 옛 흠모하던 애인을 위로하기위해 마련한 점심자리에 동석을 한 터였다. 세상의 거친 것과 바닥의 인생을 다루며 삶을 헤쳐온 그 법관출신의 노인은 노인답지 않게 냉철하고 단호했다. “제 인생은 완전 실패작입니다.” 오남매의 아버지로, 사회에서는 알아주는 변호사로 성공한 삶을 살아온 그는 오남매를 모두 미국유학을 시켜 박사, 교수가 된 “한국형 성공한 삶”의 표본이었다.
“이 나라에는 법과 정의가 없습니다. 법과 정의가 없는 나라에서 법관을 지냈다는 것은 법을 모르는 어진 사람들의 주머니를 짜서 부를 누렸다는 예기가 아닙니까? 저는 법을 알아서 이 사회를 헤쳐 여기까지 왔지만 제 아이들은 법을 모르는 알몸댕이 철부지라 모두 유학한 미국에 머물러 살도록 귄했지요.” 그 노신사는 아직도 열정과 꿈이 있다고 했다. “제가 죽기 에 꼭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사람만들기 작업」에 여생을 바칠까 합니다. 우선 「나」를 찾는 일이지요. 우선 나를 찾으며 「인간만들기」에 동참을 시키는 일인데, 그게 그리 쉽지 않더군요. 「돈찾는 일」에는 거대한 조직이 동원되어 여지없이 잘 굴러가는데 「사람만들기」 작업에는 돈도 많이 들고 조직도 단단해야 되는데 그게 막상 시작하려 하니 쉽지가 않아요.”
돈 버는 일과 객관적 행복의 노예가 되어 개미처럼 버겁게 살아 온 한국인들에게 이제 시원한 호숫가, 높은 나무위에 앉아 ‘나’를 비춰보고 ‘인생’을 돌아보는 매미의 멋이 생길만 한 때가 된 것인가? 머리 한 가닥 희지 않고 깐깐한 외모의 자주빛 머플러의 노신사는 한국인의 「새로운 열정」을 엿보게 해주고 있었다.
위 얘기는 벌써 사반세기 전 내가 사단법인 한국공연예술원을 만들고 그 법적 책임의 문제와 그 전개를 펼쳐갈 때에 주의해야 할 점등을 충고해주신 한 엘리트 노신사와 나눈 것으로, 25년이 지난 오늘 날에도 내 뇌리에서 지워지지않는 대화라 다시 한번 되짚어본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모습의 사회 속에 살고 있는가? 태반의 국회의원들이나 고급관리들은 대부분 법관출신이며 법을 안다는 그들은 법을 가지고 인간과 사회를 어떻게 비틀어가며 흔들리는 물속의 고깃덩이를 물고 자신을 비춰보며 물속의 그림자 자신의 고기마저 뺏어야 직성이 풀릴 자세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진 않는지. 요즈음 우리사회의 혼란과 무질서는 오히려 ‘법의 유희’를 통해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비틀어진 상식으로 삶을 호도하고 ‘양심과 법’은 마치 딴 세계의 동화 속 거울인 양 그 잣대와 가치가 아랑곳하지 않는 얼룩지고 비틀어진 모습의 자화상을 만들어가면서도 어찌 그리 떳떳하고 뻔뻔스러운지.
‘염치와 양심’이란 단어는 먼 옛날 태고의 잃어버린 삶의 잣대로 오늘 날 우리 사회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단어로 영영 사라져 ‘사람 구실’을 못하게 되지나 않을런지 참으로 우려된다. 그래도 사람이라면 염치와 양심을 감지할 수 있는 감성의 돌기가 무뎌져 아예 사람으로서의 잣대마저 세상에서 영영 사라질까 초조, 불안한 마음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 나만은 아닌가 싶어 더욱 불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