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27일 인쇄
2020년 11월 1일 발행
발행·편집인 / 趙楡顯
등록/1976년 1월 27일·라 2006호
2020년 11월호 통권 537호 |2025년 6월 22일 일요일|
 

춤 스크랩북

 

생전 처음 외운 詩
- 特輯 / 내 靈魂을 울린 感動의 詩




趙東華(舞踊評論家)

◊ 빗소리
중등 조선어교과서 제1과가 주요한의 「빗소리」라는 시였다.
중학교에 입학한 제일 인상적인 일이 팔목시계를 사받고, 가죽구두를 신게 되고, 그리고 처음으로 먼 타향으로 나와 하숙(下宿)하게 된 것 등등을 꼽을 수 있으나 내가 스스로 중학생이 되었음을 확인한 뚜렷한 기억은 이 시로써였다.

비가 옵니다.
밤은 고요히 깃을 벌리고
비는 뜰 위에 속사깁니다.
몰래 짓거리는 병아리같이

이지러진 달이 실낫같고
별에서도 봄이 흐를 듯이
따스한 바람이 불더니
오늘은 이 어두운 밤을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다정한 손님처럼 비가 옵니다.
창을 열고 맞이려하여도
보이지 않게 속사이며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창밖에 지붕에 들 위에
남모를 기쁜 소식을
나의 가슴에 전하는
비가 옵니다.

조선어(朝鮮語)를 가르친 선생은 박태기라는 분이었다. 그는 조선어 말고도 음악(音樂)도 가르쳤다. 그래서 그의 목소리는 아름답고 감정이 있었다.
또 그는 조선어교과서만을 계속 가르쳤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중학교 1학년생들이 감명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지 모른다.
아무튼 나는 이 시를 그대로 외워버렸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기억하고 있는 몇 개의 시 중, 그 첫 번째 것이다.
나는 「빗소리」의 시인 주요한의 소개가 책 윗줄에 작은 활자로 적혀져 있던 것을 아직 기억한다. 1900년생. 상해(上海) 호강대학(滬江大學) 출신이었던지 수업이라고 했던지 그렇게 되어 있었다. 내가 다닌 중학교의 환경이 간도(間島)의 용정(龍井)이어서 북경(北京)이니 상해니 하는 이런 지역이 별로 먼 곳이 아니고, 우리와 가까운 이웃처럼 그렇게 말하는 분이 많은 고장이었기 때문에 중학교를 졸업하면 나도 호강대학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주요한이를 한 번만 만나봤으면 소망하였다. 그 소원은 만학의 대학생이 되어서 이루어졌다. 사진으로도 뵈었고, 또 어떤 강연장(講演場)에서도 뵌 일이 있어 정작 대면하였을 때에는 별로 큰 감격이 없었고, 그저 아주 오래고 친근한 선배를 대하는 그런 기분이었다.

◊ 文學에 대한 熱望
중학교 2학년이 되자 우리는 교과서와 더불어 이윤재(李允宰) 편의 「문예독본(文藝讀本)」이라는 상하권으로 된 책도 겸해서 배웠다. 거기에 박팔양(朴八陽)의 「봄의 선구자(先驅者) 진달래꽃을 노래함」 하는 시가 있었다. 그 시를 배우던 때의 일을 나는 죽을 때까지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 시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어찌하여 이 나라에 태어난 가난한 시인이 이같이도 그 꽃을 붙들고 우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우리의 선구자들의 수난의 모습이 너무도 많이 나의 머리속에 있는 까닭이외다…」

해석 없이도 충분히 알 수 있는 대목이었고 선생님도 몸조심 때문에 별다른 해석을 더 하지 않고 그대로 넘어가려 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은 일부러 선생의 입을 통하여 그 무엇을 확인하려고 해석을 요청하였다. 물론 우리는 서로 알고 위해주는 입장이었으니까 선생님의 난처한 입장을 더 오래 보기를 원치 않았다. 그래서 누군가 큰 소리로 말하였다. 「정말 그 뜻을 몰라서 묻나! 선생님 그대로 넘어갑시다.」 심각한 장면은 웃음으로 넘겼으나 모두가 말없이 가슴속에 조선독립을 생각하고, 민족이란 것을 심각하게 생각게 했던 흐뭇한 조선어 시간이었다.
나는 중학교 3학년까지 심한 말더듬이였다. 그런데 희곡작가(戱曲作家) 김진수(金鎭壽) 선생님이 오시게 되면서 나의 말더듬은 나아지기 시작하였다.
그 선생님은 나에게 긴긴 시를 소리를 내어 읽게 하였다. 나는 그 1년 동안 읽고 왼 시는 많았다. 주로 토요일 오후는 학교 바로 곁에 있는 산등성에 올라 바이런, 롱펠로, 하이네 등등 이런 일본역시(日本譯詩)를 큰소리를 내어, 그리고 천천히 읽곤 하였다. 이때에 익힌 단어며 발상은 훗날 나의 정서생활에 아주 큰 자산이 되었고, 말더듬도 고치게 되었다. 결국 문학에 정진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어느 하나 신념있게 알고 있는 시는 없으나, 그래도 혼자 위안받고, 또 시를 음미할 줄 아는 눈을 갖게 된 것은 그때 훌륭한 선생님을 만났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서울로 올라온 해방 다음 해 가을, 비원(祕苑)에서 「학생즉흥시대회」라는 모임이 있었다. 자격은 대학생. 그것뿐이다.
시골서 올라온 이 무모한 청년은 그곳에 응모하였다.
모처럼의 일요일. 보통 때면 나는 학비 때문에 노동일을 찾았겠지만, 이날은 나의 시의 실적을 겨뤄보기 위하여 비원으로 갔다. 그때 비원이 어디 있는지 몰라 시간을 소비한 관계로 그 장소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끝날 시간 몇 분 남지 않았을 때였다. 제목은 「가을」. 무엇인가 써냈다. 그때만 하더라도 나는 많은 시를 알고 있다고 자부하였고, 또 시작(詩作)도 하였으니까 일등은 못되더라도 등수 속에는 들 줄 알았다. 그런데 발표된 것을 보니 내 이름은 없었다. 그 후부터 시인이 되는 것은 포기하고 말았다. 나는 지금은 시인이 못된 것은 별로 후회는 않지만 그때는 오랫동안 실망하였었다.

◊ 가을날
이때 제일 내 마음에 일치되게 생각나고 읊어지던 시는 베를렌느의 「가을날」이었다.

가을날
비오롱의
서글픈 소리
하염없이
타는 마음
울려주노라

종소리
가슴맞춰
창백한 얼굴
지나간 날
그리며
눈물
고이네

뜬 세상
님의 신세
바람에 날려
이것저것
떨어지는
낙엽인가 하노라

일본 동경(東京)으로 수학여행(修學旅行) 왔던 중학교 4학년 때 선배가 하숙하는 집에 가서 하루 묵게 되었다. 그의 방은 비교적 넓었는데 선배는 그 방을 혼자 쓰고 있었다. 책도 많았고, 벽에 붙인 그림도 많았다. 나는 대학생이면 이 정도 멋있게 되는 것임을 안 것 같았다. 선배는 우리가 동경에 있는 일주일 동안 한 번도 학교로 나가는 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다고 하였다. 그는 학교 때에 공부를 잘하는 분이였기 때문에 으레 대학은 그런 것인 줄 알았다.
베를렌느의 「가을날」이라는 시는 그의 책상 앞 벽에 붙어져 있던 시였다. 책에서 떼 낸 듯 압정으로 붙여져 있었다.
내가 수첩에 그 시를 옮겨 쓰고 있으니까 그대로 떼어 가지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그 시를 주절주절 일본말 그대로 읊었다. 그것이 그리도 멋있을 수 없었다. 시는 혼자 읽는 것이지 남 앞에서 부끄럽게 소리 내어 읽는 것인 줄을 몰랐던, 그때 그 선배의 읊어준 시는 나의 생활에 또 하나의 진전을 가져오게 하였다.
젊은 시절 사람들 앞에서 나는 곧잘 시를 암송(暗誦)하게 된 것은 바로 그 선배의 멋있었던 모습을 재현해 보려는 그런 욕심에서였을 것이다.
나는 요즘 내 아이들에게 많은 시를 읽기를 권한다. 그리고 어느 만치 되고 있나 체크한다. 필경 먼 훗날 아버지의 강요가 결코 나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으로 믿고, 또 설혹 모르더라도 정서있는 사람이 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 여고시대 1976년 7월호